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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가을축제 - 수원에 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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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몰랐다. 수원 화성에 정조의 한이 이렇게 깊이 배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그저 효성이 지극한 왕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수원 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례를 올리려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화성에 내려갈 때 잠깐 묵었던 곳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화성엔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치밀한 계획에 따라 구축했다. 윤선도와 유형원의 이론에 따라 계획했고,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 공사를 직접 지휘했다. 이주 비용을 줘가며 팔달산 아래로 주민을 정착시켰고, 성 외곽에 저수지를 건설하고 농지를 조성했다. 성벽 건설엔 당시 최첨단의 과학 기술이 총동원됐고, 연인원 70여만명이 공사에 투입됐다. 1794년 1월에 시작된 공사는 1796년 9월에 끝났다. 완성된 도시엔 왕실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 5000명이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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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수원 화성은 세계 최초의 계획 도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나 미국의 워싱턴 DC보다도 훨씬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건설됐다. 정조에게 화성은 분명 행궁의 도시 이상이었다. 그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장자'에서 따온 화성(華城)이란 이름은 '요임금 같은 성인이 덕으로 다스리는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갓 200년 넘은 문화재가, 그것도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게 아니라 대부분 망가졌다가 75년에야 복원된 성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이다. 여기엔 까닭이 있다. 화성의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가 "무섭다"고 말한 그 보고서다.

의궤는 화성 축조에 관한 모든 것을 이 잡듯 기록하고 있다. 일테면 1794년 9월부터 1796년 8월까지 모두 11번 있었다는 군사 회식 비용을 보자. '쌀 27섬 2되(떡.밥.술에 들어간 것) 값이 162냥 8푼, 대구어 605마리 값이 96냥 8전,… , 도합 708냥 7전 7푼(하사한 것 및 이미 지불한 물종은 불포함)'. 이런 식이다. 화성 건설 부분은 일일이 그림과 함께 설명을 붙였다. 즉 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언제라도 다시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화성만의 가치다.

수원 화성은 활용이 가능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단순히 박물된 문화재가 아니다. 누구라도 화성 위를 거닐 수 있다. 수원시의 노력이 컸다. 수원시는 99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2580억원을 화성 복원에 쏟아부었다. 올해만 900억원을 투자했다. 겨우 1조원을 넘는 수원시 예산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노력과 관심이다. 현재 화성 성곽이 둘러싸고 있는 40만 평엔 가스 충전소가 없다. 4층 이상 건물도 전체의 6%에 불과하다. 세상에 이런 도시가 또 있겠는가. 화성을 찾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수원=손민호 기자

*** 이곳은 꼭

(1) 사연 많은 행궁 567칸

정조가 아버지의 제례를 지내러 왔을 때 묵었던 궁궐이다. 그러나 화성 행궁은 단순한 행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정조는 1804년 상왕으로 물러난 뒤 여기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화성에서 아버지의 한을 풀고, 지배세력인 노론과의 싸움을 구상했다. 그러나 그는 1800년 갑자기 숨을 거뒀다. 관련 증거가 있다. 행궁 내 노래당(老來堂)은 늙은 뒤에 돌아오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얽힌 건물이다. 다른 행궁은 150~180칸이지만 화성 행궁은 567칸이다. 왕이 하룻밤 묵는 행궁의 규모를 한참 넘어선다. 왕실 친위부대 장용영이 행궁에 주둔했고,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행궁 앞 거리의 이름은 종로다. 우리나라에서 종로는 서울과 여기 두 곳뿐이다. 화성 안에서 행궁만 입장료(어른 1000원)를 받는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장용영 수위의식, 무예 시연 등의 일요상설 공연도 볼 만하다. 월요일 휴무.

행궁 옆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사당이다. 정조 어진 진품은 일제가 가져갔고 1992년 새로 그렸다. 정조가 영조를 닮았다는 기록에 의거,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그렸다고. 어진을 모신 건물인 운한각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다. 특이하게도 이름과 날짜를 현판에 남겼다. '병오중추(丙牛仲秋) 박정희'. 66년 추석에 썼다는 얘기다. 사도세자 제사에 올리는 물을 뜨던 우물이 남아 있다. 여태 방치했다가 최근 수질 검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식수 판정을 받았단다.

(2) 창룡문 옆 국궁장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수원에 오면 첫 관문이 창룡문이다. 여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성 탐방을 시작하자. 창룡문 안쪽 국궁장에서 활을 쏠 수도 있다. 하루 세번(오전 11시, 오후 1시, 오후 3시) 각 한시간씩 무료로 국궁 체험이 가능하다. 국궁장 바로 옆의 큼직한 건물은 조선시대 군사 연습을 했던 연무대다.

여기에서 성곽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한다. 시계방향이라면 창룡문~팔달문~서장대~화서문~장안문~화홍문을 지나 다시 창룡문으로 돌아온다. 모두 5.7㎞, 3시간쯤 걸린다. 망루.누각.포루.옹성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팔달문 근처만 성곽이 끊겼다. 진작에 재래시장이 형성돼 아직 철거하지 못했다고. 대신 재래시장에서 수원식 순대(지동 순대)를 먹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3) 조선후기 과학의 결정체 벽돌 성벽

수원 화성은 전성기 조선 문화의 구현체다. 그 증거가 도성 곳곳에 널려 있다. 우선 치성. 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구조물로 성 가까이의 적을 찾아내고 공격하는 거점이다. 치성엔 임진왜란의 아픈 경험이 반영됐다. 치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건 임진왜란 때의 영의정 유성룡이다. 치성이 없는 조선의 도시는 왜구에게 너무 쉽게 함락됐다. 200년 전의 역사를 잊지 않은 정조는 화성에 치성 13곳을 두었다. 장안문과 팔달문을 항아리처럼 둘러싼 옹성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치성은 벽돌로 올렸다. 벽돌 건물을 주장한 건 실학자였다. 박지원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맨 처음 주장한 게 벽돌 건물의 우수성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쉽지 않은 시도였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선 흙을 구워야 했다. 그렇다면 땔감은 물론이고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정조는 벽돌로 쌓았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와 오성지(배수통)도 화성에 도입됐다. 모두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었다. 화성 공사가 불과 34개월(실제 공사 기간은 28개월) 만에 끝난 이유다.

▶ 행궁

▶ 화서문

*** 화성 문화제

화성은 10월에 찾아가야 제 맛이다. 수원 화성 문화제가 7일부터 10일까지 열린다. 문화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정조 능행차 재현 행진. 1795년 이미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을 다녀온 8일간의 행차를 재현한 퍼레이드다. 수원종합운동장에서 팔달문까지 2.6㎞ 구간을 행진한다. 올해는 축제 사흘째인 9일(토요일) 오후 2시에 시작된다. 소요 시간은 3시간 안팎. 갖가지 복장을 갖춘 시민 7000명이 행진에 참여한다. 이외에도 체험 프로그램이 풍부하다. 토요일의 능행차 말고도 축제 기간 내내 정조 행차를 약식으로 진행하고, 화성축성체험, 정조대왕 헌다례, 과거 시험, 궁중문화 체험 축제 등 체험 행사를 여럿 마련했다. 수원시 문화관광과(www.suwon.ne.kr) 031-228-3471~3, 화성 사업소(www.suwonhs.ne.kr) 031-228-4405~7.

▶가는 길=경인선 전철 수원역에서 행궁까지 택시 요금 2000원.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영동고속도로 동수원 나들목을 나와 5분이면 창룡문 주차장. 화성에서 경부고속도로 신갈 나들목으로 가는 방향 동수원 네거리에 유명한 수원 왕갈비집이 몰려 있다.

◆ 도움 주신 분들

▶역사탐방연구회 염상균 이사▶문화유산 시민단체 한국의 재발견 강임산 사무국장

▶화성 사업소 김충영 시설과장, 김준혁 학예연구사▶수원시 문화관광과 최종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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