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2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21. 나는 광대로소이다

나는 명창보다 광대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사실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도 명창의 덕목을 정리한 단가를 '광대가' 라고 했다.

좌중을 웃기고 울리는 광대야말로 소리꾼이 갖춰야 할 기본 자세다.

판소리 무대에 서면 우선 관객을 웃기고 볼 일이다. 파안대소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려야 비로소 마음을 열고 소리에 서서히 빠져들기 때문이다.

내가 '욕쟁이 명창' 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육두문자 섞은 욕바가지를 늘어 놓는 것도 그런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소리판에서 재미가 없으면 그날로 끝장이다.

판소리는 소리 뿐만 아니라 너름새(몸짓), 고수와 관객의 추임새가 어우러질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한다. 그래서 판소리를 레코드 판이나 CD로 듣는 것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슬슬 시작하면서 판소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선입견과 거부감부터 없앤다.

가령 '춘향가' 한 대목을 시작하기 전에 목도 풀겸 분위기도 잡을 겸 이런 식의 아니리(소리가 아닌 말로 줄거리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를 보탠다.

"…아, 그런디 요새 여자들은 말여. 아, 여기 구경 온 젊은 양반들 말고, 귀경(구경)안 온 사람이 그렇다 그 말여. 아, 쓰까똔가 원 갓가튼가 그놈의 서양 치마를 딱 입었거던. 서양치마를 입고, 그 속치마 어트케 기냥 걸레같은 거 하나 입고, 요렇게 하고서는, 요기다가 꼭 요맨헌 것, 쬐간헌 것 딱 둘르고는 앉아서, 처음에는 좋게 요렇게 하고 앉아서, 한 십분만 앉었으면 요짝 다리가 저린깨, 요 놈이 차차차 내리와서 요렇게 된다 그 말여. 그라면 저기 앉은 사람이 여기 다 보여. 하하하. 아, 여기 오신 우리 학생 여러분들은 안 그렇고, 안 온 사람이 그렇다 그 말여. "

나는 판소리의 생명은 현장성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분 내키면 사설도 과감히 고쳐 부른다.

한문투도 요즘 말로 고치고 유행어도 가끔 집어 넣는다. 관객의 숫자나 수준.분위기에 따라 사설이 달라지기 일쑤다.

그래서 가끔 옛날식으로 "어느 소리할까요" , "뭐하면 좋겄소" 하고 물어본다.

요즘에는 소리꾼이 자기 목소리 자랑할 요량으로 프로그램으로 곡목을 미리 알리고 무대에 나오지만 옛날 명창들은 즉석 신청곡을 받았다. 판소리도 듣고 싶어야 들리는 법이다.

각종 기업연수나 특강에 초청을 받아 가서 신청곡을 받으면 주로 '변강쇠타령' 을 불러 달란다.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졸음이 달아날 만한 화끈한 내용이라 그랬나 보다.

다른 이들이 그저 덤덤하게 부르는 대목에도 반드시 해학을 곁들여 소리의 진진한 맛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요즘 소리하는 사람들은 가요마냥 노래만 한다. 판소리에 아니리가 절반을 차지하는데 노래만 하면 반바탕만 하고 마는 꼴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아니리가 없으면 조금만 들어도 지루해서 듣기 싫다.

처음 판소리 완창 무대는 1백석도 채 안되는 한국일보홀에서 열렸다. 무대는 작았지만 장안의 내로라 하는 귀명창들은 다 모여들었다.

요즘엔 마이크를 잡고 공연할 때도 많지만 5백석 규모라면 지금도 마이크 없이 공연할 만하다.

인간인지라 장시간 공연하다 보면 목에 무리가 온다. 졸음이 올 때도 있다. 잠을 자면서도 목과 입술은 계속 소리를 하는 때도 있다. 그래서 무대란 냉정한 곳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리하는 것을 장난처럼 여긴다.

앵무새처럼 스승에게 배운대로 흉내내기란 쉽다. 하지만 판소리는 공연할 때마다 다를 수 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한다. 다르면서도 새로워야 한다. 배운 것 그대로 읽듯이 하면 재미가 없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이장직 음악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