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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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7. 인간문화재 지정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하루는 명문대 대학교수라는 이들이 찾아왔다. 내가 인간문화재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 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대뜸 따지듯 물었다.

"당신들이 뭔데 나를 심사하시오?"

사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문화재 따위의 이름이나 지위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몹시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적벽가' 에 대해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적벽가의 처음은 무슨 내용이요?"

"삼고초려(三顧草廬)입니다. "

"삼고초려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

"유비가 제갈공명을 모시기 위해 세 번씩이나 찾아간 일을 말하오. "

이것저것 묻더니 한다는 말이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냐" 는 것이었다. 내가 묻는 것마다 술술 대답하니 아마도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길, "책 읽는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소리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절로 다 외워진다" 고 대답했다.

사실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10시간에 해당하는 완창 판소리 공연을 한번 하려면 그 대본을 적어도 10번 이상 손으로 쓰며 외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금도 나는 내 손으로 일일이 적은 손때 묻은 판소리 대본을 소중히 간직하고 연습 때마다 펴보곤 한다.

그 사람들이 돌아간 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1973년의 일이었으니 그 때 내 나이 57세였다.

그 당시에도 '춘향가' . '수궁가' . '흥보가' . '심청가' 등 다른 판소리는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적벽가' 는 부를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판소리 애호가이자 당대 지식인이던 흥선 대원군은 판소리 여섯 마당 가운데서도 '적벽가' 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지' 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적벽가' 는 부르기도 어렵거니와, 이해하는 관객들도 많지 않아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지 않은 곡이다.

그렇지만 '적벽가' 를 제대로 부르지 않고서는 진정한 소리꾼으로 자부할 수 없다. 호탕한 남성의 기상을 그리고 있는 만큼 특히 남성 소리꾼이라면 '적벽가' 를 부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립창극단으로부터 단장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러모로 도와준 국립국악원에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나로서는 좋은 기회다 싶었다.

당시 국립창극단은 73년 시작한 판소리 감상회를 주말마다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었으며, 완창 판소리 공연도 심심찮게 열었다. 물론 창극단 본연의 임무인 창극도 게을리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내가 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했던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수궁가' . '배비장전' . '춘향전' . '심청가' . '광대가' 등인데 그 중에서도 76년 공연한 '수궁가' 가 가장 인상깊다.

그 공연에서 나는 '용왕' 으로 출연했고, '토끼' 역은 조상현씨가, '별주부' 역은 남해성씨가 맡았다.

지금은 모두 '명창' 소리를 듣는 후배들이지만 당시로는 젊은 단원에 불과했으니 참 세월이 빨리도 흘렀다. 박초월, 김소희씨 등과 함께 출연한 '배비장전' 도 기억에 남는다.

두 작품 모두 연출은 이진순씨가 맡았는데, 나와 연배가 비슷했던 이씨는 연출력이 아주 탁월한 양반이었다.

창극 공연은 할 때마다 관객들로 대성황을 이뤘고, 여기저기 순회공연도 많이 다녔다. 출연자 수라든지 무대 규모에 있어서도 결코 오늘날에 뒤지지 않았으니 그 때야말로 창극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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