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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낮이 없는 무심한 내레이션, 그게 요즘 대세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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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04면

토요일 밤 11시 케이블채널 tvN을 틀어요.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에 요즘 푹 빠졌어요. 쭉쭉빵빵 정가은, 허허실실 정형돈이 내 ‘아바타(분신)’ 같아요. 예순 넘은 시어머니도, 초등학생 아들 녀석도 같이 푸하하 웃어요. CF도 UCC도 “~해요”가 대세예요.

2009 케이블TV의 대박,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

코미디 장르 ‘제3의 길’을 열다
‘롤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tvN ‘롤러코스터’는 올해 케이블 프로그램이 성취한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다. ‘막장극장’ ‘PPL 극장’에 이어 최근 ‘불친절한 가족’까지 모든 코너가 두루 인기를 얻었지만, 압권은 정형돈ㆍ정가은의 ‘남녀탐구생활’(이하 ‘탐구생활’)이다. 7월 18일 ‘소개팅’ 편을 시작으로 26일 24회 ‘지구대’ ‘운전단속’ 편까지 선보인 ‘탐구생활’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그콘서트’(KBS)로 대표되는 공개 콘서트와 ‘무한도전’(MBC), ‘1박2일’(KBS)이 주도하는 리얼버라이어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길’을 간 것이다.

“스튜디오에서 하는 기존 코미디가 아니라 야외에서 ENG 카메라로 찍어 보자”는 송창의(현 CJ미디어 제작본부장) 대표의 제안으로 시작된 ‘탐구생활’은 남녀의 서로 다른 일상과 심리에 밀착 카메라를 들이댔다. 공중화장실에서 대장균 감염을 피하기 위해 기마 자세를 불사하는 여자와 볼일을 본 뒤 손을 씻기는커녕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머리 손질하는 남자의 대비는 경악스러운 ‘생활의 발견’을 가져왔다. 라면 냄비 뚜껑을 차지한 동생 때문에 열 받아 몸싸움하는 게 남자라면, 장동건ㆍ고소영 열애설을 두고 처음 본 미용실 여자들과 뒷담화를 함께할 수 있는 게 여자다. 고고한 인문학이나 사회학적 거대담론을 빌리지 않고 ‘책상 꾸미기’라는 시시콜콜한 소재만으로도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를 대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콜럼버스의 달걀’이나 다름없었다.

‘동물의 왕국’식 남녀 관찰기
‘탐구생활’의 ‘생활’이 소재에 방점을 찍는다면 ‘탐구’에 힘을 싣는 것은 무미건조한 내레이션이다. 미국 수사물 ‘X파일’에서 이지적인 여수사관 스컬리를 더빙했던 서혜정 성우는 “아싸라비야” “우라질레이션” “이런 된장” 등의 ‘막말’을 지하철 안내방송 하듯 무심하게 읊조린다. 내레이션을 빌려 관찰한 남녀의 차이는 마치 ‘동물의 왕국’처럼 독해된다. “남자는 ~해요”는 “사자는 ~합니다” 하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스토리텔링 방식과 다르지 않다. 즉흥성 vs 주도면밀, 자아 위주 vs 타인 의식 등 남녀의 차이는 끊임없이 대립항을 만들며 쪼개져 간다. 거대담론이 해체된 뒤 미시사로 방향 전환한 역사학계처럼 코미디 프로그램이 추구해 온 ‘큰 웃음’의 강박을 벗어던진 ‘탐구생활’은 시청자(일반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맹렬하게 해부했다.

놀랍게도 이 해부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웃음’으로 승화된다. 코 풀고 방귀 뀌고 TV 보고 먹는 것 때문에 지지고 볶던 장삼이사들은 그 갈등이 개인의 잘나고 못남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인 차이 때문임을 깨닫는다. 때로는 소심하고 때로는 비루한 나의 선택이 자괴감의 대상이 아니란 게 편안하게 우습다. 일본의 위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처럼, ‘찌질’한 지식인의 내면을 풍자한 홍상수의 영화처럼 나만의 콤플렉스와 잘난 자아도취가 알고 보면 남 다를 게 없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가장 세밀하게 파고든 일상이 낯설게 투시된 순간, 웃음은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친다.

지상파 방송도 패러디…CFㆍ동영상 봇물
‘탐구생활’은 방송 3회만에 시청률 1%(AGB닐슨미디어리서치, 케이블 가입가구 기준)를 넘긴 이래 동시간대 케이블채널 1~2위를 달렸다. 11월 14일 방송에선 자체 최고 시청률 4.7%를 기록하기도 했다. 인기에 힘입어 각종 패러디물과 CF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막후 주역인 서혜정 성우는 음료ㆍ외식ㆍ통신ㆍ제균기 등 4편의 CF에서 특유의 ‘~해요’ 체를 유행시키고 있다. 일부 라디오 광고에서 서 성우의 목소리를 흉내 낸 것도 두 편이나 방송될 정도다. SBS ‘패밀리가 떴다’와 ‘한밤의 TV연예’는 각각 ‘효리의 경실 탐구생활’ ‘김범용의 탐구생활’이라는 패러디 코너를 선보였다.

최근 아이돌그룹 ‘빅뱅’의 지드래곤ㆍ대성ㆍ승리는 지드래곤의 솔로콘서트에서 ‘지드래곤 탐구생활’을 공개했고, 신승훈도 콘서트에서 직접 ‘신승훈의 탐구생활’로 자신의 모습을 소개했다. 모바일 음원시장에선 서 성우 멘트로 벨소리를 꾸민 ‘컬러링 탐구생활’ ‘크리스마스 탐구생활’ ‘기상 탐구생활(알람벨)’ 등이 인기다. ‘박지성 탐구생활’ ‘동방신기 탐구생활’ 등 인기 스타를 집중 탐구한 사용자제작콘텐트(UCC)는 물론, ‘술집 탐구생활’ ‘맛집 탐구생활’ ‘아이폰 탐구생활’ 등 UCC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탐구생활’의 히트는 올해 독립영화 ‘워낭소리’ ‘똥파리’와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주류 시장에 끼친 파장에 비견될 수 있다. 시청률 1%만 넘어도 성공이라고 보는 케이블 프로그램이 3~4%대를 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지상파와 CF를 넘나들며 어록을 생산 중이다. 변화는 올 초 온스타일이 제작한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이하 ‘프런코’)에서 감지됐다. 해외 히트 프로그램의 포맷을 구입해 ‘그림자까지 똑같이’ 재현한 ‘프런코’는 시청률 3%대를 달리며 MBC ‘무한도전’이 패러디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톡톡 튀는 개성으로 무장한 출연 디자이너들은 우승 여부와 관계없이 지명도를 확보했다. 내년에는 새로운 출연자들로 꾸려진 시즌 2가 방송된다.

메가톤급 히트는 음악전문채널 Mnet이 터뜨렸다. 대국민 오디션을 표방한 ‘슈퍼스타 K’는 총 40억원의 제작비를 투자, 전국적으로 72만 명이 참가했고 최고 시청률 8.47%의 기록을 세웠다. ‘평범한 사람들의 최고를 향한 도전’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기본 원칙을 가져가되 찡한 가족애와 ‘88만원 세대’의 승부 근성을 맵시 있게 요리해 ‘한국형 리얼리티쇼’의 전범을 제시했다.아직 케이블TV가 지상파를 넘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골리앗에 대적할 다윗은 이제 막 요람에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돌팔매질을 준비하는 팔 힘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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