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의 남한언론 길들이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 취재를 위해 어제 현지에 간 조선일보 기자가 북측 거부로 타고 간 배에서 내리지조차 못하고 있다.

회담이 30일까지로 예정된 만큼 북측이 입장을 바꿔 허가할 여지는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일단 명백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기자의 하선마저 거부한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다.

특히 이번 금강산 적십자회담은 6.15 남북 공동선언의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첫 만남의 자리다.

가장 인도적인 이산가족 교환 방문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자리에서까지 이런 불상사가 생기니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 있는 상호 불가침 문제와 통일방안 등 난제를 앞으로 어떻게 북한과 논의할 수 있을지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상호 체제를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협의를 해 나가도 수많은 난관이 예상되는 마당에 상대측 특정 언론사의 보도 태도를 시비하고 그를 빌미로 입북마저 거부해서야 무슨 협력과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회담이란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시작된다. 이것이 남북회담이나 협상의 기본정신이다.

상대측의 체제와 관행을 존중하는 한 자유민주체제 하의 언론자유 또한 북측이 인정해야 할 현실이다.

불필요하게 북을 자극하는 보도 자세도 문제지만, 자기네 '구미' 에 맞지 않는 언론사라 해서 거부하는 것은 우리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북측은 그간 조선일보와 한 방송사에 대해 '공화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하겠다' 고 공언해 왔다.

결국은 해결됐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도 두 언론사 기자의 취재를 거부해 출발 직전까지 논란거리가 된 바 있다.

이밖에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1998년 11월에도 두 언론사 소속 기자의 입북을 허가하지 않아 이틀 동안 하선하지 못했던 사례도 있다.

이번에 조선일보 기자가 풀기자가 된 것은 취재단의 추첨에 따른 것이었고 이미 나흘 전에 명단을 통보한 바 있다.

그동안 가부 의사표시가 없다가 회담 당일 현지에서 거부를 했으니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조처다.

金대통령 방문 때의 공항 환대와 공동선언문이 나오기 전이라면 으레 그런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남북 두 지도자가 확인한 지금에 와서까지 종래의 폐쇄적 조처를 계속한다면 이는 앞으로의 화해.협력시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쁜 징조임을 북측은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도 이같은 원칙적 문제에 대해선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설령 입북이 실현되더라도 재발 방지를 위한 북측의 확답을 받아야 한다.

한 기자의 입북 거부는 한 언론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체제의 인정과 향후 교류.협력 증진을 위한 첫 단추가 될 중대 사안이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