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백수의 전문용어 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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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백수들을 다 만나보겠다"며 일본에 가 있는 전국백수연대 대표 주덕한(앞줄 모자)씨. 일본판 백수인 ‘식객(食客)인간’들과 함께 찰칵.

"아이, 작은아버지. 백수라뇨? 지금 IT 사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회원들을 멤버십으로 운영하면서 인터넷 콘텐트를 제공하는 신개념 아이템인데요…."

"어, 어, 그려? 뭔지는 몰라도 그것 참 괜찮겠구먼. 그래 한번 잘해봐."

1993년 대학 졸업 뒤 한동안 취업했던 기간을 빼면 꼬박 6년을 무직 상태로 보낸 '베테랑' 백수 주덕한(36)씨.

그가 백수 신분을 달고 나서 처음 맞은 명절날 친척들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내세운 전략은 '전문용어로 혼 빼놓기'였다. 주씨의 고향은 경기도 포천의 한 농촌마을. 어른들 대부분이 시골분임을 착안, 일부러 영어를 섞어가며 기죽지 않고 대화를 주도해 나갔던 것. 작전은 대성공. 잘 모르는 내용이 나오니 어른들은 더이상 직장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핑계도 한두 해. 백수 기간이 길어지면서 "도대체 그놈의 사업은 언제 하는 거냐"는 질책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새로 개발한 아이템은 조카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씨의 아버지는 7남매 중 장남. 그의 사촌형제는 모두 17명이며 외가 쪽까지 합치면 40명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밑으로 조카들이 이름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바글바글하다. 추석날 친척들이 모두 모이면 30평 남짓한 주씨의 집은 과포화 상태가 되게 마련.

주씨는 차례상을 물리는 동시에 조카들을 몰고 집 뒷산으로 올라갔다. 양치는 목동처럼 하루종일 조카들을 방목(?)하다 해질녘쯤 내려왔다. 조카들에게 인기 관리도 하고, 친척들 잔소리는 피하면서 오히려 집안을 조용히 만들어 줬다고 칭찬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던 셈.

그동안 '전국백수연대' 대표로 취임하고 자기 이름으로 책도 내는 등 '대한민국 공인 백수'로 자리매김한 주씨. 이제 주변에서 취직하라는 잔소리는 거의 수그러들었지만 얼마 전부터 "백수라도 좋으니 빨리 결혼하라"는 내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가정이 생기면 알아서 백수생활 청산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작전을 선회한 것 같단다.

"친척들 구박을 거의 다 극복했다 생각했는데 또 새로운 도전이 나타났다"며 너털 웃음을 짓는 주씨. 그래도 이번 잔소리만큼은 그다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필규 기자

*** 이러면 문제 없다 / 백수 추석나기 노하우

선배 백수들은 추석을 어떻게 보냈을까. 17일부터 5일간 '네이버 지식in'을 통해 들어 본 네티즌들의 노하우를 공개한다.

(1) 동정형=지난 추석, 전날 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소주도 한 잔 곁들였다. 그리고 딱 5시간만 잤다. 퉁퉁 분 나의 얼굴은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나에게 시비 거는 친척은 아무도 없었다. (lantos)

(2) 애교형=장보기.만두빚기.과일깎기.설거지 등을 도맡아 했다. 워낙 일손이 딸리는 때라 취직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ringe14)

(3) 사기형=추석 지나고 바로 취업된다며 호들갑 떤다. 연휴 끝난 뒤 적절한 시기에 이실직고하는 게 관건. 부작용이 클 수 있다. (wenjinhyun)

(4) 도피형=영화관.할인마트 등 추석 때 사람 못 구해 난리인 곳에서 아르바이트 한다. 집에선 욕먹겠지만 스트레스 피하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 (hyacinthblue)

(5) 뻔뻔형=숨기려고 하니까 스트레스받는 거다. 현실을 인정하라. 누가 "너 언제 취직할래"하면 " 내 일자리 알아봐 줄래요?" 되묻고 조카가 "용돈 줘"하면 "나 백수야. 돈 없어"라고 솔직하게 나가는 게 낫다. (xxxu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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