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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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약의 남.오용을 줄이기 위한 의약분업은 국민 보건을 위해 반드시 성공적으로 정착돼야 할 제도다. 그러나 방법이 서투르면 곤란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환자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파국만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왜 의료계 집단 폐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을까.

정부가 의료계와 협상을 벌이며 내놓았던 당근과 채찍의 실제 의미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근은 두 가지다. 의약분업을 하되 주사제는 예외로 하며, 의사들의 처방료를 올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의약분업의 원칙을 정부 스스로 어긴 것일 뿐 아니라 의료계의 반발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약을 먹어 치료할 수도 있는 병을 주사로 치료하는 잘못된 진료 관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주사제 예외는 이처럼 잘못된 관행을 고치지 못하고 고스란히 남게 한다. 약의 남.오용을 막는다는 의약분업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약사회는 약사회대로 주사제 예외에 대한 반대 투쟁을 즉각 선언하고 나섰다.

이는 명분이 확실한 일인데, 정부는 약사회의 반대 투쟁도 또다시 집단 이기주의로 몰며 다른 당근을 미봉책으로 내놓을 것인가.

처방료 인상도 마찬가지다. 병원이 약 처방을 많이 할수록 진료 수익이 늘어나므로 과잉 진료의 소지를 여전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약분업안을 반대하는 의사들을 달래기 위해 처방료를 올려 준다면 국민이 더 많은 약을 먹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올바른 해결책은 처방료 인상보다 진찰료 인상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의약분업 문제의 핵심이다.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듣고 진찰하는 무형의 서비스에 대해 적정한 수가(酬價)가 인정돼야 의약분업 본연의 취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비의 문제는 다 덮어둔 채 '3일분 처방료 2천8백여원' 만으로 생색을 내려는 정부에 대해 의료계가 더욱 반발하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는 당근과 함께 채찍도 내밀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같은 채찍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악수로 작용했다.

전공의는 물론 의대 교수까지 나선 의료계의 반발은 단순히 '돈벌이' 의 문제가 아니며 전문 직종으로서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정부가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미 구속을 각오하고 자청(自請)까지 하고 나선 의협 집행부에 대해 실제로 사법 처리가 이뤄진다면 이는 기름에 불을 갖다 대는 격이 될 것이다.

문제는 국민이다. 당장 암환자들의 수술 스케줄이 취소되고 혈액 투석으로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야 할 환자들도 오늘부터 당장 거리로 내몰릴 판이다.

응급 진료는 유지된다지만 의료의 손과 발이 돼야 할 전공의들이 빠진 가운데 최소 인력만으로 파행 진료가 이뤄짐을 감안할 때 수십명의 환자가 응급실을 전전하다 생명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의약분업의 첫 단추는 '의보 수가' 에서부터 제대로 끼워졌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 일이 여기까지 온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미 의약분업은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지금처럼 주사제 예외와 같은 일시적 미봉책을 남발하며 대처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참에 지역 의보에 대한 국고 지원과 낙후된 공공 의료, 비현실적인 수가 문제 등 의약분업과 관련된 보건 문제를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의사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양심 진료를 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의료계도 폐업을 무조건 중지하고 정부와 대화에 나서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태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현행 의약분업안에 임의 조제의 소지가 있고 의약품 분류가 선진국 기준에 미달한다는 등 의료계의 불만은 일리가 있으나 이것도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부도 의약분업으로 문제점이 나타나면 시행 3개월 뒤 약사법 개정을 통해 보완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지 않았는가.

정부를 믿지 못한다면 국민은 믿어야 한다. 분업 시행 후 의료계의 지적대로 문제점이 나타난다면 국민이 가만 있지 않겠지만, 의료계 역시 국민이 등을 돌린다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없다.

의약분업은 7월 1일 시행이란 과녁을 향해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의료계는 폐업을 철회하고 다시 정부와 마주 앉아야 한다.

홍혜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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