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DJ"민족의 밝은 미래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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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반도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2000년 6월 14일 평양의 밤.

남과 북의 두 정상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합의문에 서명했다.

환한 표정의 두 사람은 이어 손을 굳게 맞잡고 흔들었다. '6.14 서명' 의 감동적 장면이다.

앞서 있던 만찬에서 "비로소 민족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고 감격에 겨워했던 金대통령. 서명 순간에 그런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金대통령은 합의한 뒤 "화해와 협력과 통일에의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 선언한 바 있다.

55년동안 증오와 대결의 한반도를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바꾸려는 각오와 다짐의 현장.

1972년 7.4 공동성명, 그리고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명과 달리 남북 최고 지도자의 결의가 담긴 합의여서 감동의 폭은 더욱 컸다.

백화원 영빈관에서 있은 이날밤 감동의 모습은 남북한 국민에게는 물론 전세계에 곧바로 생생하면서 신선한 충격으로 전달됐다.

합의문 서명에 앞서 두 정상은 평양 목란관에서 金대통령 주최로 만찬을 가졌다. 두 정상은 물론 양측 수행원들 모두 내내 화기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이에 앞서 오후 6시50분 평양 백화원 영빈관. 金대통령과 金위원장이 환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왔다.

3시간5분의 마라톤 회담 끝에 4개 항을 합의해낸 순간이었다.

회담은 오후 3시~5시20분, 오후 6시5분~6시50분 두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金위원장의 웅변조 얘기가 간간이 회담장 밖으로 흘러나왔다. 회담장 밖에서 양측 수행원들은 초조하게 회담결과를 기다렸다.

수행 중인 박준영(朴晙瑩)청와대 대변인은 "金위원장이 뭔가를 깊이 있게 설명하려고 했다" 면서 "전체적으로 회담분위기는 좋은 것 같았다" 고 전했다.

회담이 길어지자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고 권해 45분간 쉬었다가 다시 회담을 시작했다.

두번째 회담 시작 전 두 정상은 각자 다른 방에서 휴식을 취한 뒤 회담장으로 걸어오다 복도에서 마주쳤다. "편히 쉬셨습니까" (金위원장) "잘 쉬셨습니까" (金대통령)두 사람은 회담장으로 들어가면서도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45분뒤 합의를 이뤄냈다.

이날 회담은 오후 3시 金위원장이 金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1층 홀로 들어온 金위원장을 金대통령도 활짝 웃으며 맞았다.

두 사람은 전날 첫 상봉 때처럼 두 손을 마주잡았다. 이어 사진기자를 위해 4~5초간 악수를 한 채 포즈를 취했다.

金위원장은 전날의 갈색 점퍼형태 인민복 대신 공식 국가행사에서 착용하는 회색 인민복 정장을 입었다. 회담이 공식적인 것임을 연출하는 의미인 셈이었다.

왼쪽 가슴엔 김일성 배지를 달았고, 안경도 전날의 갈색기운이 도는 엷은 선글라스 대신 맑은 금테안경을 썼다. 표정도 전날보다 더 밝아진 듯했다.

회담장은 당초 金위원장의 집무실로 예상됐으나 金위원장이 14일 새벽 영빈관으로 바꾸었다고 우리측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우리 민족은 동방예의지국으로, 젊은 金위원장이 가는 게 좋겠다는 뜻을 북측에서 전해와 변경됐다" 는 설명이다.

두 정상은 영빈관내 회의실에서 열린 단독회담에 앞서 5분간 공개대화를 나눴다.

특히 金위원장은 김치 얘기를 화제에 올리며 북한 김치가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을 표시했고 '한국식 김치' 라는 표현도 썼다. 우리 국호를 처음 사용한 셈.

金위원장은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와 제스처로 분위기를 끌고가려 했고 金대통령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응대했다.

金위원장은 "구라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은둔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金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는 등 간간이 유머섞인 말을 해 좌중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金위원장은 이 대목을 꺼낼 때 "적들은…" 이라고 했다가 다시 "아, 저 외신들은…" 이라고 고쳤다.

金위원장은 그러나 "남쪽 테레비를 통해 실향민과 탈북자를 소개하는 것을 많이 봤다" 며 金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인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회담장의 대형 탁자 위에는 탁상시계가 놓여져 있었다. 두 정상은 길었던 회담을 시계바늘을 보면서 한 셈이다.

두 정상 앞에는 메모지와 물수건, 또 흰접시 위에 청포도.사과 등 약간의 과일도 담겨 있었다.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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