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덮고 미루고 말리고'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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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공직자들의 기강해이가 심각하다. 언론에 연일 보도되는 사례들을 보면 위 아래 할 것 없이 나사가 풀려도 한참 풀렸다는 느낌이다.

사정당국은 최근 일부 장관들이 업무시간에 골프장에 나간 사실을 파악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데 이어, 업자들과 어울려 거액의 내기골프를 한 중앙부처 간부들을 내사 중이라고 한다.

또 자치단체 공무원들이 관련업체에 관급공사 정보를 흘려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가 적발되는 등 업무와 관련한 비리가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

또 경찰관들이 윤락업소로부터 정기상납을 받는가 하면 비리업소를 적극적으로 비호해온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같은 현상이 특정조직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공직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현 정부 초기에는 대통령 직속의 반부패특위가 설치되는 등 공직비리에 대한 사정의지가 각별했고 공직자들의 경각심도 높아진 분위기였으나 어느새 슬그머니 고질적인 비리 불감증과 복지부동의 모습이 되살아난 것이다.

특히 공무원들의 무사안일 태도는 과거보다 오히려 심해진 분위기다. 그런 공무원들의 헝클어진 업무자세를 빗대어 요즘에는 '3고' 라는 말이 나돈다고 한다.

공무원들이 '하던 일은 덮고' '할 일은 미루고' '남의 일은 말리고' 한다는 뜻이다. 정권교체 후 진행 중인 각종 개혁정책에 지혜를 짜내고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공무원들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걱정스럽다.

이대로 간다면 레임 덕 현상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타날 수 있다. 공직기강을 바로세우는 특단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공무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공직개혁과 사정작업 없이는 공직자들의 의식을 바꾸기 어렵다.

그러나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될 일도 아니다. 확실한 의지와 함께 공무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일관되고 공정한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3고' 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어찌보면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본다.

현 정부 출범 직후 공직 부정부패 척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는 반부패법조차 제정하지 못하는 등 후속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한 마당에 공무원들이 어떻게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또 '3고' 속에는 공무원들이 느끼는 일종의 피로감이 담겨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한다. 특히 정권교체 후 꾸준히 제기돼온 지역편중 인사에 대한 불만이나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 무너져 '3고' 라는 반발심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공직사회를 바로세우지 않고는 정부나 정책에 대한 신뢰도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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