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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中. 인내심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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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상회담은 성사되기도 어렵지만 결실을 보기는 더욱 힘들다. 역사 속의 정상회담들은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장기적 안목과 인내력을 바탕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은 경우에만 좋은 성과를 거뒀다.

◇ 판을 깨지 않는다〓1970년 3월 19일 세계인의 이목은 분단 25년 만에 열린 첫 동.서독 정상회담에 집중됐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만난 동독의 에어푸르트엔 세계 각국의 보도진 6백여명이 몰려 들었다.

때마침 동서진영의 데탕트도 무르익어 뭔가 커다란 것을 합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회담장 안에서 합의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양측의 입장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서독은 동.서독 관계를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 로 보았으나 동독은 국제법상 별개 국가로서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요구했다. 단 한번의 회의로 무언가를 합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전.오후 두 차례의 공식 회담이 소득없이 끝나자 브란트는 밤 늦게 슈토프를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선 모든 의제를 배제한 채 다음 회담 장소와 날짜만을 논의했고 두달 뒤 서독에서 2차 회담을 갖는다는 합의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자칫 깨질 뻔했던 동.서독 회담은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89년까지 모두 네 차례 계속됐다.

서독으로 돌아간 브란트는 기자회견에서 "회담에 앞서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않았다. 2차 회담으로 이어가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성공사례로 기록되는 역대 정상회담 중에 첫 만남에서부터 성과를 얻어낸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나 정상들은 첫술에 배를 채우지 못했다고 판 자체를 깨지는 않았다.

◇ 의제를 좁힌다〓88년 6월 1일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중거리핵전력(INF)폐기협정에 서명, 핵무기 군축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협정은 2년7개월 동안 두 사람이 인내를 갖고 벌인 릴레이 회담의 결과물이다.

85년 11월에 열린 첫 회담의 의제는 ▶공격용 전략무기 50% 감축▶유럽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제거▶미국이 추진 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대기권 밖에서의 미사일 요격체제 구축)에 대한 협의였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아무 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듬해의 두번째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담장 밖으로는 고성이 튀어나왔고 미.소 관계는 전례없이 경색됐다.

군축회담의 전기는 87년 2월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제거를 다른 의제와 분리, 협상할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선 데서 마련됐다. 미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SDI 문제를 접어둔 것이다.

이로 인해 두 정상은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4%(소련 1천8백46기, 미국 8백46기)를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3차 회담에선 두 정상의 마라톤 협상이 고르바초프의 제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INF 폐기까지 이끌어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외교전문기자 돈 오버도퍼는 "미.소 군축회담의 성공비결은 불가능한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논의한 데 있었다" 고 분석했다.

◇ 집안 일부터 해결한다〓98년 10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반은 워싱턴에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군의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막바지 협상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회담의 최대 장애요인은 양측 과격파의 협상반대였다. 회담 나흘째, 이스라엘 남부에서 이슬람 과격파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우파들이 회담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네타냐후는 이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과감하게 회담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내 여론을 잠재우고 시간을 벌기 위해 고도로 계산된 제스처였다.

아라파트 역시 "테러 추방을 위해 공동수사를 벌이자" 며 성의를 보였다. 네타냐후가 일방적으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자 이스라엘의 내부 반발은 곧 진정됐다. 네타냐후는 이를 바탕으로 회담을 재개했다.

아라파트 역시 내부 반대세력을 끌어안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회담 전 대(對)이스라엘 투쟁에 참여하다 이스라엘에 체포된 3천6백여명의 석방을 성사시키겠다고 반대파를 다독거린 뒤에야 비로소 회담장으로 향했다.

두 정상은 먼저 국내정세를 안정시킨 뒤 자신감을 갖고 회담에 임할 수 있었고, 결국 두 정상은 '땅과 평화를 교환한다' 는 중동평화 협상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담긴 와이리버 협정에 서명할 수 있었다. 내치에 성공하는 자만이 외교무대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철칙을 되새겨준 회담이었다.

예영준.이상언.장정훈 기자

◇ 도움말 주신 분〓문정인(文正仁)연세대 교수, 서병철(徐丙喆)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서진영(徐鎭英)고려대 교수, 손주영(孫主永)한국외대 교수, 이종택(李鍾澤)명지대 교수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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