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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국보급' 해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 4일 인터넷을 강타, 세계 유수의 사이트들을 일시에 마비시킨 '러브레터 바이러스' 는 10억달러대의 피해를 발생시켰다 한다.

바이러스 방지용 백신 프로그램과 차단장치 개발에 고도의 기술과 엄청난 자금.인력이 투입돼 온 사실을 생각하면 이 바이러스는 굉장한 수준의 프로그램일 것 같다.

그런데 1주일만에 밝혀진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마닐라의 AMA 컴퓨터대학은 대학이라기보다 기술학원에 가까운 곳이다.

고급기술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고 졸업생 대부분은 출장수리 등 컴퓨터업계의 하급직에 종사한다.

문제의 바이러스는 이 학교 학생 하나가 만든 졸업작품으로 밝혀졌다.

오넬 데 구스만이란 이름의 학생이 이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필리핀의 열악한 인터넷 보급상황 때문이다.

인프라가 시원찮기 때문에 필리핀의 인터넷 이용자들은 비싼 사용료를 물어야 한다.

구스만은 인터넷에서 다른 사용자들의 비밀번호를 뽑아내 '빌려'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교수들은 이 프로그램이 불법행위에 쓰일 수 있다고 해서 퇴짜를 놓았지만 구스만은 혼자 이것을 가동시킨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프로그램의 위력은 사실 구스만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다.

비밀번호만 뽑아와야 성공인데, 프로그램이 조잡해 표적 컴퓨터에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은 이 소동을 자랑스러워하기만 한다.

'범인' 의 신원이 밝혀지자 신문들은 '필리핀의 자랑!' '우리도 할 수 있다!' 등의 제목을 연일 뽑고 있다.

이 소동을 계기로 사이버공간의 보안문제가 다시 부각됐다.

컴퓨터 후진국의 한 청년이 고급기술이나 조직력은커녕 범의(犯意)조차 없이 벌인 장난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힐 정도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보의 가치는 비밀성에 있다.

공개된 정보는 지식일 뿐, 개별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정보가치의 보호를 위해 사람들은 옛날부터 암호(暗號)를 만들어 썼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암호술이 정교하게 발달해 왔고, 2차 세계대전은 '암호전쟁' 이라 불릴 만큼 정보전의 양상이 됐다.

그런데 진행 중인 전자정보화 앞에서는 또다른 차원의 정보 보안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양자역학이 이 대책을 맡고 나설지 주목을 끌고 있다.

문외한들에게 신비의 영역일 뿐 아니라 물리학자들조차 사변(思辨)의 영역으로 여겨 온 것이 양자역학이다.

한 입자의 관측이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다른 입자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양자역학의 기본가설을 암호술에 이용하려는 실험이 여러곳에서 동시에 진행 중이라 한다.

80여년간 물리학의 첨단분야로 연구되면서도 응용의 길이 없던 양자역학이 사이버공간 질서의 원리로 등장한다면 그야말로 큰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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