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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들고 가는 그릇만큼 채워주는 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산길로 접어들어 몇 걸음 떼지 않은 기슭에 젊은 엄마가 다리를 꼽치고 앉은 곁에 어린아이가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길섶을 뒤지는 걸 보니 쑥을 뜯는 모양이다. 바로 아래 서울의 북악터널이 고분(古墳)의 입구처럼 입을 벌리고 있어 그 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들 소리가 채 사라지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엄마는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슴푸레한 추억을 캐 내어 아들에게 심어 주려는지 진지하기만 하다.

청학사를 지나 영불사로 이어지는 북한산 길에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그래서인가. 꾸…꾸…꾸꾸, 멧비둘기가 능선 위에서 구성지게 목울대를 울리고 꺼엉…껑, 장끼가 계곡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저들끼리 춘흥을 돋운다.

또 길옆 애솔 가지엔 새 순들이 꼿꼿이 돋아, 거기 포슬포슬 묻어 있는 송홧가루 냄새가 코끝에 고소하다.

계절의 쳇바퀴에 습관이 돼 무디어진 마음으로는, 언제나 처음이듯 지치는 법 없이 목숨붙이마다 숨을 불어넣는 자연의 섭리를 어림잡기 힘들다.

정릉과 청수동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바위에 이르니 아주머니들이 빙 둘러앉아 있다.

한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기도를 한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일요일 아닌 날을 잡아 산행하는가 보다.

산 하면 절을 떠올리지만,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예수가 산상수훈 설교를 한 곳이 산이니 교회와 산의 만남도 예사롭지 않겠다.

골방에서 혼자 하는 기도와, 얼키설키 복잡한 회로기판 같은 뭇 삶의 거처를 발 아래 두고 하는 기도는 뭔가 다르지 싶다.

"아이고, 이거 죽지 못해 이렇게 다니는구먼. "

작은 봉과 큰 봉의 형제 봉우리를 넘어 보국문 아래로 칼바위 허릿길을 가로지르다 마주친,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건넨다.

한 손엔 지팡이를, 다른 손으로 비탈길의 바윗돌을 잡고 기다시피 하며 덜덜 흔들거리는 오른다리를 끌어올리는… 풍을 맞아 이 꼴이라는 아저씨가.

힘내세요, 건강 찾으실 거예요.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내쳐 오르는 아저씨의 흥건히 젖은 등에서 눈길을 떼기가 죄송하다.

"조심하세요" 라고 말했지만 부축해 드릴 피붙이도 없는가 하여 가슴이 먹먹하다.

산행 끝머리인 빨래골 약수터 앞에 물통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시간이 걸리지만 그 물통엔 빠짐없이 물이 가득 담길 것이다.

산이 우리에게 그와 같음을 믿는다. 건강.기도.추억…. 어떤 그릇을 들고 와도 '산은 필요한 만큼 지치는 법 없이 채워준다' 는 금언을.

배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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