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중앙일보 기자 발신추적 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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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장영자(張玲子.55)씨의 구권(舊券)화폐 사기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본지 사회부 기자의 휴대폰에 발신자 추적장치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 물의를 빚고 있다.

검찰의 통보는 수사기관이 취재원과 언론인의 접촉을 감시함으로써 취재원 보호를 원칙으로 하는 언론의 기능을 손상시킨 중대한 언론자유의 침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서울대 박승관(朴承寬.언론정보학)교수는 "피의자를 체포하는 것은 수사기관이 해야할 일이지 언론인의 취재원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침해하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다" 며 "이는 아직도 언론의 취재권한을 우습게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라고 말했다.

경실련 사무총장 이석연(李錫淵)변호사는 "언론의 특성상 범죄 혐의자와의 접촉이 잦은데 수사기관의 판단이 모두 옳은 것이 아닌만큼 언론이 이런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보장돼야 한다" 며 "취재원과 기자의 접촉을 수사에 이용한다면 아무도 권력기관의 문제점에 대해 언론에 말하려 들지 않을 것" 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지검 서부지청 형사2부 임안식(林安植)부장검사는 지난 12일 오후 사회부 이가영(李佳穎.여)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李기자의 휴대폰에 '발신 번호 표시' 기능을 걸어둘 테니 張씨로부터 전화가 오는 대로 번호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고 통보했다. 李기자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張씨와 전화 인터뷰를 한 바 있다.

李기자가 "발신 번호 표시를 나의 동의없이 신청할 수 있느냐" 고 반문하자 林부장검사는 "문제될 게 없다" 고 대답했다.

林부장검사는 이어 "원래 기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신청해도 되지만 '협조해 달라' 는 차원에서 미리 말해 주는 것" 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15일 "알고 보니 李기자의 휴대폰이 법인 명의로 돼 있어 절차가 복잡해 발신 번호 표시 장치를 설치하지 못했다" 고 말했다. 이는 李기자의 휴대폰이 개인 명의로 돼 있었다면 얼마든지 임의신청이 가능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검찰은 지난달 24일 張씨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았으나 張씨를 검거하지 못하자 李기자의 휴대폰에 발신지 추적장치를 설치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발신 번호 표시는 전화 폭력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가입자가 전화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휴대폰의 경우 전화를 거는 사람이 수신인과 같은 이동통신회사에 가입해 있으면 전화가 오는 대로 액정화면에 발신 전화번호가 찍히게 된다.

문제는 이 서비스가 반드시 '폭력의 피해를 당한 당사자' 가 신청을 하도록 돼 있다는 점이다.

李기자의 휴대폰이 가입돼 있는 SK텔레콤측은 "본인 신분증과 피해를 당했다는 수사기관의 증명서 등을 본인이 직접 가지고 와야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수사기관이 해당 서비스를 받으려면 법원의 긴급통신제한조치 허가서를 받아와야만 가능하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林부장검사는 "李기자가 검찰에 신청을 위임한 형태를 취하면 이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고 밝혀 동의 없이도 신청이 가능함을 내비쳤다.

하지만 검찰의 다른 수사 관계자는 "개인의 동의 없이 이런 일을 하려면 모두 영장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김성탁.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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