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정권공약 딜레마에 빠진 하토야마 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하지만 이 문제는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정부가 떠안고 있는 ‘매니페스토(정권공약)의 딜레마’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 시사점이 보인다. 일본 민주당이 자민당의 아성을 54년 만에 무너뜨린 원동력은 새로운 비전과 꿈을 담은 정권공약이었다. 주체적 외교를 하고 정부 행정을 개혁하고 복지정책을 강화한다는 솔깃한 것들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이를 믿고 민주당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 ‘계약서’를 놓고 지금 한바탕 혼란을 겪고 있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외부 이전이 대표적이다. 이 공약은 미·일 동맹 균열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하지만 하토야마 총리는 “오키나와 주민과의 약속”이라며 이를 번복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함께 저녁을 한 민주당 의원은 “외교 분야의 간판 공약이어서 정말 곤혹스럽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세종시 논란과 흡사한 군마현의 얀바댐 건설 중지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관료들이 주물러온 공공사업을 축소한다는 공약에 따라 전국 143개 댐 건설 계획을 재검토 대상에 올렸다. 얀바댐은 이 정책의 상징이다. 주민들은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다. 댐을 건설해도 효율성이 없어 예산만 낭비한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복지 공약의 간판인 아동수당도 골칫거리다. 중학교 졸업 때까지 매달 2만6000엔을 지급하는 이 약속을 지키려면 매년 5조 엔의 돈이 필요하다. 하토야마 총리는 “국민과의 계약은 지켜야 한다”고 거듭 밝히고 있지만 엔고와 디플레가 압박하는 일본 경제는 이런 공약을 뒷받침할 여유가 없다. 불황으로 세수가 크게 줄고, 재정 적자가 악화하면서 내년에도 1%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대세다. 디플레는 3년간 지속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를 ‘하토야마 불황’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복지공약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세종시 논란은 일본의 형편만 봐도 타산지석이 보인다. 공약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 개선할 여지가 있는데도 덮어둬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하토야마 정부도 내부적으론 출구를 찾고 있다. 무리한 공약에 대해선 변경 가능성을 언론에 흘려 여론을 떠보는 등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표 때문에 말이 앞섰지만 지킬 수 없는 공약은 바꾸는 것이 순리이자 국익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눈길을 밖으로 돌리면 복잡한 사안이 객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세종시 논란도 마찬가지다. 멀리 갈 것 없이 공약의 덫에 갇혀 끙끙대는 일본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만 잠깐 봐도 좋다. 세종시 논란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