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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북한… 지금 변화중] 6. 경제법 정비 러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98년 12월 17일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경상학부 202호. 북한의 부부장(차관)급 인사를 포함한 10여명의 관리가 강의내용을 노트에 받아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사는 미국 뉴욕대 법학과 헤즐타인(가명)교수. 북한 관리들이 그동안 '철천지 원쑤' 로 간주해온 미국인 교수에게 배우고 있는 것은 국제상법(International Business Law)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99년 8월 북한은 '대외경제중재법' 을 발표했다. 총 4장 43조로 구성된 이 법률은 북한 관리들이 베이징 강좌에서 배운 국제법상 중재법 개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대외경제중재법은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金正日)총비서가 추진하는 경제분야의 법적.제도적 정비작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북한은 지난 3년간 '경제법 러시' 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경제법령을 집중적으로 개정해왔다. 98년 9월에는 사유재산 개념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새 헌법을 채택했으며 지난해에 새로 제정하거나 개정한 경제법률만도 14개에 이른다. 특히 개인소유.대외무역.외자유치 3개 분야의 법적 변화는 '혁명적'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우선 개인소유와 관련, 북한은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 및 협동단체 소유 대상을 축소했다(제21, 22조). 이 조치로 북한 주민들이 가축.농기구.주택.자동차.어선 등을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

또 텃밭 생산물에 대해서도 소유범위를 확대했다(제24조). 또 민법을 비롯한 법체계 곳곳에 원가.가격.수익성 같은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반영한 것도 눈에 띈다. 북한법 전문가인 장명봉(張明奉)국민대 교수는 "북한의 법률체계가 전반적으로 개인 소유의 범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변해

가고 있다" 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대외무역 활성화를 겨냥한 각종 법규도 속속 제정하고 있다. 98년 3월 제정된 '무역법' 을 통해 대외무역을 체계화한데 이어 헌법 개정과정에서도 그동안 국가가 독점해왔던 대외무역을 일반 사회협동단체에도 허용했다. 또 지난해 4월에는 '인민경제계획법' 을 채택하면서 "기관.기업소.단체는 수출계획의 예견된 제품을 먼저 생산해야 한다" 고 규정(제32조), 수출의 중요성을 적극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이런 분위기는 70년대 우리가 내세운 '수출입국' 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특히 외자유치를 겨냥한 평양의 법령 개정 작업은 '극성' 에 가까울 정도다. 84년 9월 합영법을 제정한 북한은 94~96년 '무역제일주의' 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했다.

이어 91년 12월에는 나진.선봉 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으며 그 후에도 외국인 세금법(93년 1월).외국인 투자법(94년2월)을 제정한데 이어 외국인기업법.합작법.외국투자은행법.토지임대법.외화관리법 등 10여개의 법률을 속속 제정했다.

물론 이같은 '경제법 러시' 배후에는 바닥을 드러낸 외화난과 엉망이 된 수출전선이 숨어 있다. 90년 19억6천만달러에 달했던 북한의 수출고는 98년 5억6천만달러로 떨어졌다.

또 92년 초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나진.선봉 경제특구 투자액도 8천8백20만달러에 불과한 실정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이 법률제정 못지않게 시장경제 연수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4월 평양에서는 세계은행이 후원하는 '경제관리연수' (Economic Management Training)가 열렸다.

이 연수에 참여한 북한 경제관료 30명은 7주간에 걸쳐 수요 공급 원칙.사유재산.국제회계기준.조세.통계처리 방법 등을 집중적으로 습득했다.

이밖에도 호주에서는 현재 10여명의 중견 관리가 대학에서 시장경제 연수를 받고 있다.

북한 진출을 구상 중인 외국인들은 법률을 많이 만드는 것보다 실효성있게 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프리 존스 주한상공회의소(AMCHAM)명예소장은 "북한이 진짜로 외국기업의 진출을 원한다면 재산권에 대한 명확한 보장과 분쟁 발생시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분쟁해결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특별취재반〓유영구.최원기.정창현.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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