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애꿎은 동양증권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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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금융감독원이 현대그룹의 자금사정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렸다며 동양증권을 중징계하겠다고 나선 모습은 영화 '타이타닉' 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타이타닉의 선장은 배만 믿고 무리한 운항을 고집하다 빙하에 부딪혀 침몰위기에 몰리자 부하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린다.

"3등석 승객들에게는 알리지 말고 1등석 손님부터 대피시켜라. " 그러나 1등석 사람들이 갑판 위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본 몇몇이 위기상황을 3등석 사람들에게도 알렸고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와 보자. 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은 25일 경제장관간담회 직후 "한국.대한투신에는 공적 자금을 투입하겠지만 현대투신은 현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것" 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음날 크레디리요네증권사는 李위원장의 말을 근거로 현대투신의 대주주인 현대전자 등 계열사들이 부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기관투자가들에게 돌렸다.

이를 본 동양증권은 한술 더 떠 최근 증시에 떠돌아 다니던 현대관련 루머까지 곁들여 자사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고, 이것이 다시 사설 주식정보 사이트를 타고 일반투자자들에게 퍼졌다.

이날 미 나스닥시장의 폭등에도 불구하고 현대계열사 주가가 무더기로 하한가로 밀리며 국내 증시가 폭락하자 동양증권은 그 주범으로 몰렸다. 유수의 증권사가 루머를 인터넷에 올려 특정기업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날 주가폭락은 개인들의 부화뇌동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 계열사 주식을 시장에 마구 내다 판 쪽은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이 개인에 비해 엄청 높다는 외국인과 기관들이었다. 개인들은 오히려 현대 계열사 주식을 많이 사들였다.

그런데도 폭락세가 동양증권 탓이라고 몰아대는 당국의 태도는 단지 희생양을 찾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태는 또 다른 문제점도 일깨운다. 사실 이날 동양증권이 퍼뜨린 현대관련 루머는 기관이나 외국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비록 소문이긴 하지만 기관이나 외국인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개인투자자에게 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잘못됐다면 정보 공유면에서 개인은 영원히 불리할 수밖에 없는가.

증권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대우그룹 붕괴사태를 경고한 노무라증권의 보고서가 기관들 사이에 공공연히 돌아다녔을 때도 금감원은 물론 언론까지 이를 쉬쉬 하며 덮기에 급급했다" 고 꼬집었다.

정경민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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