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이테크 유괴범' 줄행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일본의 초등학교 2학년 남학생을 유괴한 범인 2명이 5일만인 25일 경찰에 붙잡혔다.돈을 요구한 전형적인 유괴사건이다. 그러나 범행은 신종 수법이었다.

지금까지 유괴사건은 가족과 가능한한 접촉을 줄이고 몸값을 수중에 넣을 기회를 엿봐왔다. 신분노출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범인들은 가족에게 48차례에 걸쳐 전화를 했다. 그뿐 아니다.

자신들의 휴대전화 번호까지 버젓이 가르쳐줬다. 절대 발각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실제 경찰은 전화번호를 통한 추적을 포기해야 했다.범인들이 신원확인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불식 휴대전화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선불식 휴대전화는 2년전 발매된 이래 약 38만대나 보급된 기종이다. 보통 휴대전화와 달리 가입절차 없이 본체를 구입한 뒤 3천엔짜리 등 전화용 카드를 사서 카드에 들어 있는 등록번호를 입력해 사용한다.

과다 사용을 막을 수 있어 어린이용 선물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전화번호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범인들은 이 익명성을 악용했고, 수사당국은 그 사각지대를 뚫을 수 없었다. 범인들은 또 가명계좌의 현금카드를 이용했다.

은행의 현금지급기는 전국에 3만개나 된다. 범인들은 휴대전화로 입금을 요구했고 입금한 즉시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빼내가는 기민함을 보였다. 경찰의 현장검거는 불가능했으며, 방범 비디오를 보고 뒷북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은 8년 전부터 실명계좌를 의무화하고 있으나 그 전의 가명계좌는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가명계좌는 인터넷을 통해 버젓이 거래되기도 한다.

경찰은 휴대전화 업자와 금융당국을 상대로 대책을 호소하지만 바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경찰은 당분간 하이테크 도구의 익명성에 골머리를 앓게 됐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