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사공 많은 선거사범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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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당선사례 현수막이 거리에 나붙기 시작하면서 국민들의 시선이 검찰로 쏠리고 있다. 선거사범 수사가 총선 결과 못지 않은 관심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대국민 담화에서 "정치적 차별수사는 없을 것" 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도 기자회견 때마다 이 문제를 빼놓지 않고 거론하고 있다.

선거법 위반사범의 엄정한 처리는 이미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부분이다. 혼탁.과열이나 선거부정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당선만 되면 그만' 이라는 풍토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거사범은 검찰이 '법대로' 처리만 하면 될 뿐 결코 정치적 다툼의 대상은 될 수 없는데도 모두가 이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은 왜인가.

검찰권 독립이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일로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검찰을 윽박지르는 행태까지 있으니 한심하다. 자신들이 고발한 사건을 검찰이 불기소할 경우 모두 재정신청을 내겠다는 선관위나 처벌당할 위치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성명내기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정당들이 대표적인 예다.

선관위는 15대 총선 당시 자신들이 고발한 1백32건 중 31.11%인 41건밖에 기소되지 않아 자존심이 상한 때문인지 재정신청을 크게 활용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뜻이야 좋지만 '공명선거' 라는 목적을 두고 국가기관끼리 법집행을 둘러싼 마찰을 빚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더구나 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하기 전부터 으름장 놓는 것은 선관위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도 준다.

선거사범 수사를 여야가 경쟁적으로 정치쟁점화하는 것도 미심쩍다. 잘못을 저질러 처벌받을 당사자들이 왜 먼저 나서는가.

제1당을 차지하지 못한 민주당이 새삼 엄정한 수사를 강조하는 것은 특히 문제다. 적발된 당선자나 총선사범이 가장 많은 처지에 무슨 낯으로 수사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주문한단 말인가.

집권당으로서 선거사범이 많은데 대한 사과나 반성은 않고 미묘한 시기에 엄정한 수사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으니 자칫 속셈이 있거나 검찰에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한나라당도 범법행위가 드러나면 주저없이 처벌받겠다는 당당한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근거없는 주장이나 섣부른 정치쟁점화로 마치 상당한 잘못이 있는데도 정치적으로 무마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후보자 전과공개 때도 한나라당은 결과적으로 전과자가 다른 당보다 특별히 많지 않았는데도 웬일인지 자신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수사 착수시점부터 지레 겁을 먹고 "표적수사나 야당탄압은 안된다" 고 주장하는 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리다' 는 의심을 받기 십상이다.

물론 검찰이 손가락질 받는 것은 전적으로 검찰 책임이요, 자업자득이다. 모든 것이 검찰을 믿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도 병역비리 수사를 갑자기 서두르고 옷로비 사건 재판을 총선 뒤로 미루는 등 검찰의 자충수는 있었다.

그러나 선거사범 수사는 검찰 외에 대안이 없다. 어떻게 해야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가뜩이나 주눅들어 있는 검찰의 기를 더욱 죽이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결과가 나온 뒤 잘못됐으면 호되게 꾸짖고 야단치며 바로잡도록 하는 게 옳다. 검찰 뒤에 법원이나 선관위도 있지 않은가. 또 총선기간 중 선거사범 단속 과정에서 여야 형평성 시비가 없었던 점에 일단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검찰도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그간의 불신을 씻을 절호의 기회다. 더이상 정치권력에 휘둘리면 검찰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자면 투명한 공개수사로 의혹을 남기지 않는 게 급선무다.

또 관할 지청별로 맡겨진 선거사범을 지검 단위로 끌어올리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제 국민들로부터 박수받는 검찰 모습을 보일 때도 됐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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