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정시성 前 남북회담사무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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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생전에 그토록 남북 정상회담을 고대하셨는데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시다니…. "

정시성(鄭時成.65)전 남북회담사무국장이 지병(신장염)으로 17일 별세했다는 소식에 접한 통일부 직원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고인은 남북대화 업무에 일생을 바친 '30년 남북대화의 산 증인' 이다. 1971년 적십자회담사무국 회담운영차장으로 남북대화에 첫 발을 디딘 그는 72년 이후락(李厚洛)전 중앙정보부장의 비밀방북을 수행해 7.4남북공동성명의 실무합의에 참여했다.

90년대 들어서도 남북고위급 회담과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 산파역을 맡았다.

특히 94년 정상회담 준비 때는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과 독대해 김일성과의 대면요령.회담전략 등을 브리핑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맡기도 했다.

남북대화의 야전사령관이라는 회담사무국장을 7년간 지냈고, 평양도 8차례나 다녀온 그는 북한 대화일꾼들 사이에선 '데드 마스크(Dead Mask)' 로 불렸다.

회담 중 전면에는 나서지 않는데다, 거무튀투한 얼굴색에 '실없는 소리' 는 삼가하고, 잘 웃지도 않아 붙여진 별명이다.

딸 경순(景純.제일투신증권 근무)씨는 "일때문에 가정을 잘 챙기지 못하셨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원칙에 충실했던 분" 이라며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제대로 유언도 못하셨다" 고 울먹였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책임감과 무거운 입.

"그 분 병은 하루이틀에 온게 아니예요. 남북조절위가 한창이던 70년대 회담 사무국에서 밤을 지새다시피하고, 찬바닥에 새우잠을 잔게 화근이었죠. 간과 신장이 점차 나빠지는걸 본인도 알았지만 회담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다보니……. "

鄭국장 밑에서 일했던 이관세(李寬世)통일부 공보관은 이렇게 안타까워 했다.

80년대말 자동차 운전면허 연습중 충돌사고로 목뼈를 다치고도 집무실에 꼿꼿이 앉아 업무를 챙긴 일화도 지금까지 주위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경순씨는 "워낙 업무에 대해서는 입이 무거워 평양을 오갈때도 가족에게 운조차 떼지 않았다" 면서 "어렸을 적에는 그저 '지방출장을 다녀오시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이한동(李漢東)자민련 총재.이시윤(李時潤)전 감사원장.남재희(南載熙)전 서울신문 사장 등 쟁쟁한 동기(서울대 법대)들이 있었지만, 그는 곁눈질 없이 천직(天職)인 남북대화의 외길을 걸었다. 이런 공로로 보국훈장 천수장(80년)과 홍조근정훈장(92년)을 받았다.

지난 95년말 정년퇴임한 고인은 출판사로부터 자서전 발간 제의가 줄을 이었지만 "회담일꾼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는게 정도(正道)" 라며 거절했다.

6월 평양정상회담 합의 발표(10일)직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고인은 의식이 흐릿한 가운데서도 정상회담 소식을 전해듣고 감격스러운 눈물을 보였다고 아들 형진(亨振.강원 주천보건소 공중보건의)씨는 전했다.

함북 단천출신인 고인은 19일 북녘땅이 내려다 보이는 실향민 공원묘지인 동화경모공원(경기도 파주)에 묻힐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은용씨와 1남1녀. 빈소는 서울중앙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9시. 2224-7352.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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