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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안 낳는 사회] 1. 이제 출산은 '구국의 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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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열흘 전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육아용품을 구입하느라 50만원, 수술비와 입원비를 합해 80만원 들었습니다. 돌볼 사람이 없어 산후조리원 보냈더니 비용이 200만원 나왔고요. 이건 시작에 불과하겠죠? 주택 융자 갚아가며 아이 키울 생각하니 막막합니다. 애 낳는 것…정말 구국의 결단입니다."

최근 '다음'사이트의 저출산 관련 토론방에 올라온 글이다. 아이 낳기가 '구국의 결단'만큼이나 힘들다는 토로가 곳곳에서 들린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우리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이어진 경제난으로 살림이 쪼들리면서 자녀 양육의 체감비용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 돈 없어 애 못 낳아요=이동통신회사에 근무하는 민상기(36)씨는 다섯살배기 아들 하나를 뒀다. 터울이 더 지기 전에 둘째를 낳으려던 그의 바람은 교사로 맞벌이를 하는 부인의 반대로 무산됐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아이 여럿도 잘 키울 수 있지만 우린 아니죠. 아들 하나라도 남들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시키자는 아내의 말에 결국 수긍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봐주시는 장모님께 드리는 용돈(60만원)과 유치원.방문 학습지 비용 등 다달이 100만원이 양육비로 들어간다"는 그는 "학교 들어가면 영어학원이다, 어학연수다 해서 돈이 훨씬 더 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자기 먹을 것은 다 타고난다'고 믿던 1960년대엔 여성 한명이 자녀를 평균 여섯명씩 낳았다. 하지만 요즘은 한명 낳아 키우기도 버겁다며 아우성이다. 한 집당 자녀 양육비는 132만원으로 가계지출의 절반(56.6%)이 넘는다(2003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자녀 수가 줄었지만 보육비용과 교육비는 오히려 늘어나 아이를 많이 낳지 못하도록 만든다.

맞벌이가 일반화한 가운데 여성이 가정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기 어렵게 하는 갖가지 사회 제도며 환경도 출산을 가로막는다. 맞벌이 여성 중 3분의 2(61.6%)가 일과 양육을 병행하기 힘들어 아이를 더 낳을 수 없다고 했고, 3분의 1(34.4%)은 직장 때문에 자녀 수를 줄인 경험이 있다(2003년 한국여성민우회 조사).

의류회사에 다니는 서현주(34)씨는 어렵사리 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해 돌쟁이 아들을 키운다. 그는 "120만원씩 아줌마 월급을 주고 나면 솔직히 직장 다녀도 남는 게 별로 없다"며 "하지만 어린이집을 전전하느라 직장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느니 아이 클 때까지 몇년만 참자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고 했다.

◆ 결혼은 아무나 하나=결혼한 부부가 애 낳기를 꺼리는 것만 출산율 감소의 원인은 아니다. 가치관 변화.취업난 등으로 결혼을 하지 않거나 늦게 하는 젊은이가 급증한 것도 출산율 저하의 큰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해 우리나라 가임 여성(15~49세) 한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합계출산율)는 1.19명이었지만, 기혼 여성의 출산율을 따로 집계해보니 1.7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승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기획조정실장은 "대부분의 부부는 여전히 한명 이상의 자녀를 낳는다"며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하지 않아 출산할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10년째 캠퍼스만 맴돌고 있는 한상호(29.A대학 국제학대학원 3학기)씨. 취업문이 워낙 좁아보여 대학 3년 때 중퇴하고 좀 더 유망한 과로 전공을 바꿔 편입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취업할 자신이 없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씨는 "나보다 조건이 좋은 친구들도 취업에 실패한 경우가 많아 앞으로 대학원을 마친다 해도 걱정"이라며 "한때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내가 취업할 가망이 별로 없다며 그쪽 집에서 반대해 깨졌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혼 남녀의 결혼 시기는 자꾸 늦어진다. 지난해 여성의 초혼 연령은 27.3세, 남성은 30.1세다. 90년(여성 24.8세, 남성 27.8세)과 비교해 보면 각각 3년 가까이 늦어졌다.

김두섭(사회학과) 한양대 교수는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는 이유는 가치관의 변화 때문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난"이라며 "따라서 저출산을 해결할 최선책은 정부가 경제를 살려 청년실업을 해소하고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김시래 차장(팀장),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신성식.신예리.박혜민.김영훈.김정하.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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