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한지를 입다 편견을 벗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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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우리 패션 업계도 지금, ‘전통의 현대화’를 위해 여러 가지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에스모드서울은 개교 20주년을 맞아 전주 한지를 이용한 옷감으로 패션전시를 열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친환경적인 한지사(絲)가 12개국 17개 분교 학생들의 손에 의해 ‘세계인의 옷’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글=서정민 기자
사진=홍루(홍루스튜디오)

12개국 디자인 학교서 한지로 옷을 만들다

“당신 나라만의 소재는 무엇입니까?”

에스모드서울의 박윤정 이사장은 해마다 열리는 세계분교장회의에서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무통(양의 모피), 튀니지에도 타피가 있는데 우리에겐 ‘한국만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소개할 소재가 없었죠.”

박 이사장은 3년 전 전주시에 들렀다가 답을 찾았다고 했다. 전주 한지로 실을 만들고 원단을 제작하는 회사인 ‘쌍영방적’을 알게 되면서다. 박 이사장은 에스모드서울 학생들과 함께 한지사를 이용해 옷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2008년 분교장 회의 때 한지사로 만든 원단을 소개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한국 전통의 종이로 실을 만든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친환경 소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거죠.”

박 이사장은 곧바로 각 분교들과 함께하는 ‘한지사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전 세계에 한지사의 우수성을 알리자는 계획에서였다. “한국의 전통 신소재인 한지사를 세계 시장에 진출시키려면 외국 패션 디자이너들이 직접 만져보고 의상을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게 박 이사장의 생각이었다. 2008년 11월 시작해 지난 1년간의 결실이 바로 12개국 17개 분교의 학생들이 참여한 ‘한지絲, 세계를 입다’ 전시다.

면·실크와 섞어 짠다, 물에 빨아도 변형 없어

한지사는 우리의 전통종이인 한지를 얇게 잘라 꼬아 만든 한지 실을 면·실크·울 등의 다른 섬유와 섞어 제직한 직물이다.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슬리팅이라는 기계에 넣어 1~4㎜의 한지 가닥을 만든 다음, 이것을 실을 꼬는 기계인 연사기에 통과시키면 한지사가 된다. 위사와 경사 중 하나를 이 한지사를 이용해 다른 소재의 실과 섞어 짜면 한지 직물이 만들어진다.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물세탁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지사로 만든 직물은 20회 이상의 반복 세탁에도 형태가 변하지 않을 만큼 내구성이 튼튼하다고 한다. 오히려 한지 특유의 장점이 기존의 직물에는 부족했던 요소들을 보완한다. 예를 들어 곰팡이 및 유해 세균 발생을 방지하는 항균성이 뛰어나다. 또한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없으며 황토나 참숯 수준의 원적외선도 방출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그동안 한지사는 한복이나 휴식복, 또는 속옷과 유아용품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돼 왔다.

에스모드서울이 개최한 ‘한지絲, 세계를 입다’ 전시의 의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가지 패션 아이템 중 일부에서 ‘예술품’ 또는 ‘기능성 제품’으로만 쓰여 왔던 것을 일상적인 아웃웨어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에스모드의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표현, 실용화에 한걸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우아하고 가벼운 느낌” 한국이 궁금해졌다

“염색한 후 시간이 지나도 그 색이 변하지 않는 등 한지 소재의 뛰어난 장점에 놀랐다. 특히 볼륨을 만들거나 접어서 특별한 효과를 내는 데는 아주 탁월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일본 에스모드오사카의 3학년 학생 가슈아 겐지는 한지사 사용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 학생은 한지사의 매력에 푹 빠져 일본 고베 패션 콘테스트 결선에 참가할 3벌의 작품을 모두 한지사로 제작 중이다. “실크와 혼용된 한지 소재의 우아하고도 가벼운 느낌이 좋았다.”(에스모드브라질 2학년 파비오 P 풀란&발비아누스 빅터), “순수하고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에스모드베이징 2학년 리우슈)

처음 한지사를 사용해본 학생들은 가볍고, 염색이 잘 되며, 볼륨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는 점을 한지사의 장점으로 꼽았다. 반면 “원단이 약해 다림질이 조심스러웠다” “다소 뻣뻣하고 잘 구겨져 봉제하는 데 어려웠다”는 소감도 있었다.

전 세계 학생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수천 년 전부터 사용한 전통 종이를 이용해 직조된 한지사 섬유로 작업하는 동안 한국과 한국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였다.

‘한지絲, 세계를 입다’ 전시는 29일까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크링’에서 개최되며, 12월 7일부터 11일까지는 전북 전주시청에서 열린다.



에스모드서울은

13개국 20개 분교망을 갖춘 에스모드파리의 서울 분교로 1989년 처음 설립됐다. 실무위주의 3년제 패션전문교육기관으로 개교 이래 13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 한국의 패션산업을 이끄는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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