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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직책 외 군더더기 없어, 1인자는 심플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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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사람이 유명해지면 명함은 퇴화한다.’
명함 수집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유명한 사람들의 명함은 대부분 단순하다는 말이다. 미국 명함 수집가 리처드 새턴은 최근 LA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이름이 알려지면 명함은 절대 왕정 시기 방문용 카드로 퇴화한다”고 말했다. 현대 명함은 이름 정도만 적었던 17세기 방문용 카드와 세세한 연락처와 하는 일들을 빼곡히 적었던 18세기 영국의 트레이드 카드(Trade Card)가 결합해 진화했는데, 사람이 유명해지면 명함은 이 진화 과정과는 반대로 변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트레이드 카드식에서 아주 단순한 17세기 방문용 카드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최고 권력자의 명함은 간략하다 못해 단순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명함에는 한글로 이름이 크게 쓰여 있다.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만 적혀 있다. 삼척동자도 아는 권력자인 자신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뒷면에는 영문으로 ‘Lee Myung-bak President Republic of Korea’라고 적혀 있다. 한글 쪽과는 달리 청와대 부속실과 e-메일 주소가 적혀 있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 명함을 만들기는 했지만 쓰지는 않는다”며 “외국 정상에게 주는 선물에 명패 삼아 대통령 명함을 넣는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명함에 황금색으로 봉황과 무궁화 문양을 넣었다. 전면에는 한글로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을, 뒷면에는 ‘Rho Moo-hyun President Republic of Korea’를 써넣었다. 영문 쪽에 전화번호와 e-메일을 밝힌 이 대통령과는 달리 노 전 대통령은 적지 않았다. 대통령만큼 유명하다는 정치인 박근혜 의원의 명함도 단순한 쪽이다. 박 의원은 아무런 문양 없이 ‘국회의원 박근혜’라고 적은 뒤 전화·팩스 번호, e-메일·홈페이지 주소만을 넣었다.

하지만 지역구 국회의원 명함은 트레이드 카드형이다. 한나라당 김영우(경기 포천-연천)의원은 명함으로 지역 마케팅을 하고 있다. 그의 명함 뒷면은 포천과 연천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인터넷 주소와 연락처로 빼곡하다.

톱스타들은 거의 명함 없어


경제 권력자인 대기업 오너들 명함도 간단한 편이다. 단, 기업이미지통합(CI) 차원에서 대표적인 문구나 로고를 넣어 전체 임직원의 명함과 겉모습은 같다.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은 투자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명함보다 자회사인 보험회사 게이코의 명함을 더 많이 사용한다. 그의 친필 서명이 곁들여져 미국 경매 사이트에서 300~400달러에 거래된 버핏의 명함에는 보험회사 이름인 게이코와 상담 전화가 적혀 있을 뿐이다. 대신 ‘무료 자동차 보험 견적’이란 말을 추가했다. 대주주로서 회사 비즈니스를 돕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국내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SK 로고를 크게 넣고 한자로 ‘최태원 회장’이라고 적었다. 전화·팩스 번호나 e-메일 주소는 넣지 않았다. 주소만 적혀 있을 뿐이다. LG 구본무 회장은 조금 색다르다. 플라스틱 재질의 명함을 사용한다. 역시 적는 내용은 단순하다. ‘대표이사 구본무’라고만 적혀 있다. 영어 명함을 따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뒷면은 비어있다.

대기업 오너들의 명함이 대대적으로 바뀐 적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경영 혁신과 지배구조 개혁 바람이 거세게 불자 오너의 명함에서 ‘○○그룹 회장’이란 직함이 사라졌다. 대신 ‘○○기업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새로 쓰이기 시작했다. 상법상 의미가 불분명한 ‘그룹 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책임과 권한이 분명한 ‘대표이사’ 직함을 쓰는 게 새로운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톱스타급 가수나 탤런트, 영화배우, 코미디언 등은 아예 명함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얼굴이 명함이기 때문이다. 명함을 건네고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매니저들이 대신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톱스타 연예인들의 명함이 대통령이나 유명 정치인보다 한 수 위인 셈이다. 단, 유명한 연예인이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외부 직함을 갖게 되면 명함을 제작해 들고 다닌다.

개그맨들은 명함을 가지고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민관은 KBS 공개코미디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서 “그렇게 스타가 되고 싶어? 뜨고 싶으면 연락해!”라고 외치며 명함을 뿌린다. 방청객들이 환호하는 문제의 명함에는 무슨 말이 적혀 있을까. ‘노브레이크 엔터테인먼트 대표 한민관’이다. 실재하지 않는 회사다. 또 최양락은 취재기자가 명함을 건네면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며 “제 명함입니다”라고 말해 상대의 웃음을 자아낸다.

최양락은 명함 대신 주민증 보여줘
유명 인사들도 이른바 ‘뜨기 전’에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정보나 문양, 색상을 넣었다. 정보통신(IT) 아이콘인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뉴멕시코 앨버커키의 허름한 창고에 마이크로소프트(MS)를 설립한 뒤 아마추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던 시절 명함은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끌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흰색에다 회사 로고를 넣은 MS의 표준화된 현재 명함과는 달리 오렌지색으로 명함 테두리를 장식했다. 서양에서 오렌지색을 명함에 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1860년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라는 시골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쓰던 명함도 전형적인 무명 시절의 특징을 담고 있다. 19세기 서체로 이름과 직업을 적고 그 밑에는 이력서에나 들어갈 법한 자기 소개가 길게 적혀 있다. 옛 트레이드 카드의 흔적이다.

유명 인사들도 독특한 디자인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스티브 잡스와 함께 IT 회사인 애플을 공동 설립한 스티브 워즈니악은 ‘컴퓨터의 천재’ ‘실리콘밸리 우상’ 등으로 불리는 유명인이지만 독특한 명함을 사용했다. 2006년 그는 회색 금속으로 명함을 만들어 썼다. 내용은 일반 명함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재질이 쇠붙이여서 ‘스테이크 커터(Steak Cutter) 명함’으로 불리기도 한다.

워즈니악이 그런 명함을 쓰는 이면에는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는 애플의 그늘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기술자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도전했다. 2006년 스테이크 커터 명함을 만든 것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활용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신생 회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IBM과 모토로라, 미 국방부·연방수사국(FBI) 등을 해킹해 ‘금세기 최고 해커’로 알려진 케빈 미트니크도 독특한 명함을 선보였다. 그는 컴퓨터 보안컨설팅회사를 차린 뒤 쇠붙이로 명함을 만들었다. 명함에는 금고털이들이 쓰는 도구들이 새겨져 있다. 보안장치를 뚫고 들어간 자신의 이력과 이를 바탕으로 컨설팅해주는 현재 직업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명함수집가 리처드 새턴은 “유명 인사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아진다”며 “방문 카드형(단순한) 명함은 인생의 절정을, 트레이드 카드형(특이하고 복잡한) 명함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강남규·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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