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승리는 너흰 이제 뭘 할 거냐는 국민의 채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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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의 외딴 농가에서 칩거해 온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야외의 테이블에 앉은 그가 따뜻한 녹차를 마시면서 자신이 찾는 정치의 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민주당은 지난달 28일 실시된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에서 승리했다. 다섯 개 지역구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3 대 2로 이겼다. 양당의 승패를 가른 곳은 수원 장안이었다. 이곳에서 민주당 이찬열 후보는 한나라당 박찬숙 후보를 물리쳤다. 처음엔 지지율에서 뒤졌던 이 후보가 역전극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부터 강원도 춘천의 농가에서 칩거해 온 손 전 대표는 선거 때 수원에 진을 쳤다. 그리고 곳곳을 누비며 “이명박 정부를 견제할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수원에 직접 출마하라’는 당 지도부의 요구를 물리치고 자기 사람으로, 이지역을 관리해 온 이 후보를 밀어 판세를 뒤집었다.

“닭 키우면서 자연의 오묘함 깨달아”
선거 후 당이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고 있을 때 손 전 대표는 춘천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왜 영웅 대접과 스포트라이트를 마다하고 산골로 들어가 버린 걸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20일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의 대룡산 기슭에 자리 잡은 외딴 농가로 그를 찾아 나섰다.

그는 해진 등산화를 신고 마당을 거닐다 기자를 맞이했다. 검정 사파리를 걸치고, 은회색 목도리를 두른 그의 모습은 농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은 듯 얼굴에 난 수염도 제법 길었다. 그는 “날씨가 차지만 집안이 좀 답답하니 밖에서 얘기하자”고 하더니 “저기 저 닭들을 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수탉과 암탉을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수탉의 볏은 똑바르고 꼬리는 길게 뒤로 처진다. 그러나 암탉의 꼬리는 작기 때문에 끝이 모아지고, 뒤로 처지지 않는다”고 했다.

손 전 대표는 닭 50여 마리와 칠면조 두 마리, 개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부인 이윤영씨와 함께 직접 모이와 먹이를 준단다. 그에게 ‘자연에서 뭘 배우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저기 저 까만 닭을 자세히 살펴 봐라. 까만 털 사이 사이에 흰 털이 많이 나 있다. 참 조화롭고 예쁘게 나 있지 않느냐. 조물주는 동물 하나에 대해서도 저런 아름다움을 심어놓고 즐기지 않나 싶다. 미학적 장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곳에서 깨닫는 건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위대함이다. 인간이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저 까만 닭처럼 예쁘게 만들 수 있겠느냐.”

그에게 ‘이젠 정치 얘기를 좀 해 보자’고 했더니 닭장에서 15m쯤 떨어진 야외 테이블에 앉자고 했다. 옆에선 오골계 4마리와 인삼·대추 등을 넣은 가마솥이 장작불에 달궈지고 있었다. 손 전 대표는 “여러분이 온다고 해서 닭 백숙을 끓이는 중이다. 덕분에 점심을 잘 먹게 됐다. 손님이 없으면 아내와 둘이서 김치와 소찬으로 점심을 때운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재·보선 결과를 보고 뭘 느꼈나.
“민심이 정말 무섭다는 걸 절감했다. 이번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기가 좀 올라가는 중이었으므로 상당히 걱정했지만 국민은 결국 야당을 밀어줬다. 이명박 정부가 멋대로 한다는 인식이 대중 사이에 확산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시민은 정권의 독주·독선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 4대 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것도 거부감을 주고 있지만 방송 진행자 김제동씨가 사회를 보지 못하게 된 것도 민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지방 언론사 사람들은 국가정보원이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문제라고 말하더라.”

-국정원이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국정원이 정치적 간섭을 하고 있다고 본다. 김제동씨가 (방송 프로에서) 아웃된 것도 그 때문이다.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가 국정원 사찰 의혹을 제기했는데 그 분의 평소 성격이나 언행으로 봤을 때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박 변호사는 협력관계를 맺었고, 현 정부가 탄생했을 때 그래도 기대를 걸었던 분이다. 그런 분이 국정원의 문제를 제기한 건 ‘나한테까지 이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시 칩거 생활을 하나.
“내가 수원 장안 지역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당에선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나가면 쉽게 의석을 얻을 것이란 판단에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내가 후보가 돼 쉽게 이기는 게 당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역에서 자랐고, 지역에서 일한 정치인 이찬열이 선거에 나가서 이기는 게 당을 위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후보를 도왔고, 선거가 끝났으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고,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국민은 ‘우리가 민주당 너희를 도와줬으니 너희는 앞으로 어떻게 할 테냐’라며 우리에게 채찍을 가하는 것 아닐까.

우린 지난 대선 때 맥없이 무너졌다. 그걸 국민 탓으로 돌릴 순 없기 때문에 국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우린 냉정하게 성찰해 봐야 한다. 우리가 다시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모색하고 있다.”

-어떤 길을 찾고 있는 건가.
“이명박 정부가 탄생했을 때 국민은 기대를 걸었지만 지금 서민과 영세상인·자영업자·중소기업인은 좌절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가 좋아졌다고 떠들지만 그들에겐 아무런 혜택도 돌아가지 않고 있다. 현 정권은 이해타산을 미끼로 사람들을 비굴하게 만들면서 인간성을 파괴하는 일도 자주 벌이고 있다. 4대 강 사업에 참여한 한 작은 건설업자가 ‘돈 때문에 하는 거지만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 보수정권 탄생 2년 만에 많은 국민이 좌절감·낭패감에 빠져 희망과 꿈을 가꾸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은 20여 년 전 시골에서 상경해 고생하고 돈을 벌어 카센터를 하나 차렸다. 그러나 이젠 그런 사람이 열심히 일해도 카센터 사장이 쉽게 못 된다.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꿈을 못 꾸는 사회, 이건 심각한 문제다. 내가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할 수 있는가, 그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다. 이명박 정부가 못한다면 민주당이라도 해야 한다. 강자가 끼리끼리 살고, 소수자와 약자는 점점 더 어렵게 살게 되는 걸 극복하는 진보적 가치를 민주당은 세워야 한다. 중요한 건 그런 진보의 가치가 이데올로기 틀에 묶여 국민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진보, 그런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진보, 보수의 가치도 수용할 수 있는 진보를 정립하는 게 내가 고민하는 화두다.”

“효율보다 신뢰와 균형이 더 큰 가치”
-세종시 논란을 어떻게 보나.
“나는 경기도 지사였을 때 수도 이전은 반대했지만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드는 건 찬성했다. 경기도 과천에 있는 행정기관 일부가 옮겨 가는 것이므로 도내에선 반대가 심했지만 국가균형발전이란 과제를 외면할 수 없어 그렇게 한 것이다. 또 세종시 계획이 어떤 정치적 목적 때문에 만들어졌다 해도 이미 공주ㆍ연기에서 사업이 시작된 상황이었으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통령은 행정의 비효율을 얘기하지만 그가 대선을 앞두고 세종시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건 균형 발전과 지역 발전의 가치를 수용했기 때문 아니겠느냐.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면 장관이 국회에 가기 힘들고,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어려우며, 시간과 기름이 든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정치의 신뢰를 회복하고 국가를 균형 발전시키는 게 더 중요한 가치다. 과천으로 경제부처가 갔고, 대전에는 많은 청(廳)이 가 있는 데 그것 때문에 행정의 비효율이 심각하다는 얘기가 나온 적 있느냐. 비효율 주장은 기만이다. 이명박 정부는 효율을 강조하지만 나는 이 정권이 과연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 인간 존중이란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4대 강 사업에 대한 입장은.
“4대 강 사업이 경제성장에 도움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후진국형 모델이다. 현 정권은 국토해양부는 왕창 키워놓고,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를 없애버렸다. 나는 나로호 발사의 실패를 보면서 과기부를 없앴기 때문에 저렇게 됐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연결이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느낌이 든 것만은 사실이다. 정치학자인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TV에 나와 나로호의 실패를 설명하는 걸 보면서 과연 교과부 안에서 과학기술이 제대로 대접받는 환경이 조성돼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터뷰가 2시간 가까이 진행되자 손 전 대표는 “좀 춥지 않으냐. 백숙을 먹으면서 얘기하자”며 40평 남짓한 농가로 안내했다. 그는 식탁에 놓인 오골계를 보며 “이 놈이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랐으므로 양계장에서 키운 닭보다 살이 좀 질길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으로 닭 다리를 크게 찢은 다음 기자의 그릇에 놔줬다. 그는 “백숙 국물을 뜨겁게 해서 가져오라”고 하더니 “살을 이곳에 담근 다음 소금에 찍어 먹으라”고 했다. 오골계의 맛은 일품이었다. 생고추와 오이를 된장에 찍어 먹는 맛도 기막혔다. 손 전 대표에게 ‘이곳에서 언제 나올 거냐’라고 했더니 “때가 되면 나올 텐데 그때가 언제인지 나도 모른다”고 했다. ‘손 전 대표를 포함해 민주당 차기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이 높지 않다’고 했더니 “허허”하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국민이 잊지 않고 어느 정도의 지지를 해준다는 건 너무 고마운 일이다. 중요한 건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국민의 성심을 내가 어떻게 키워 나가느냐다. 그걸 키우고 못 키우는 건 전적으로 내 역량에 달렸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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