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족에게 헬멧 씌운 CE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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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헬멧 하나로 미국 시장을 쥐락펴락한다. 유럽 시장에서도 연일 맹위를 떨친다. 이제 중남미ㆍ아시아 시장을 공략할 태세다. 헬멧 하나로 ‘세계경영’을 꿈꾸는 HJC 홍수기(64) 회장의 이야기다. HJC와 홍 회장은 100년 만에 찾아왔다는 글로벌 불황도 두렵지 않다. 이 회사는 지난해 923억원의 매출액을 올려, 전년비 39%(664억원) 성장했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14억원에서 66억원으로 371% 늘었다. ‘미스터 헬멧’ 홍 회장의 40여 년에 걸친 드라마틱한 세일즈 인생을 몇 단락으로 나눠 봤다.

# 문전박대

HJC는 1983년 미국 시장을 노크했다. 국내 헬멧 시장을 평정한 이 회사의 기세는 대단했다. 홍 회장은 의기양양하게 테스트용 헬멧 10개만 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입성했다. “싱가포르에서 우리 헬멧을 사러 오는 것을 보고 마냥 들떴죠. 미국시장도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홍 회장의 자신감이 절망으로 바뀌는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헬멧 판매업체 로키사이클의 CEO는 HJC 헬멧을 보고 ‘바가지 같다’고 빈정댔다. 문전박대하는 CEO도 적지 않았다. 단 한 달 만에 끝난 아메리칸 드림. 홍 회장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준비하지 않는 자는 꿈조차 꿔선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 원인파악

1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홍 회장은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이번엔 제품출시 욕심을 버리고 시장조사에 매달렸다. 섣불리 도전했다가 망신살만 뻗친 1년 전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먼저 딜러(소매상)와 디스트리뷰터(도매상)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들의 머리에 한국에서 공수해온 HJC 헬멧을 씌웠고, 좋든 나쁘든 평가를 꼭 들었다. 적정한 가격대와 경쟁제품의 장단점까지 꼼꼼하게 청취했다. 그 해 만난 딜러만 해도 8000명에 달한다. 딜러뿐 아니다. 홍 회장은 무작정 거리에도 나갔다. 오토바이 매니아의 집합장소로 유명한 LA 인근 헌팅턴 비치도 종종 찾았다. 똑같이 이들의 머리에 HJC 헬멧을 씌웠다고 한다. 이를테면 예비 시장조사였던 셈이다.

# 괄목상대

미국에 재진출한지 2년 뒤인 1986년, 시장조사를 마친 홍 회장은 제품 출시에 나섰다. 판매망은 친분 있는 딜러들을 이용했고, 제품도 이들의 의견을 십분 반영해 만들었다. 반응은 빠르고 강하게 전달됐다. 그 해 3만개의 헬멧을 팔았고, 60만 달러의 매출액을 올렸다. 단숨에 미국 시장 다크호스로 주목을 끌었음은 물론이다. 1983년 ‘바가지 헬멧’이라며 홍 회장을 조롱했던 CEO가 직접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계약을 체결하자며 100만 달러를 제시하기도 했다. 홍 회장은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우리 브랜드로 승부를 걸 계획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주변에선 거액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을 두고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HJC의 헬멧이 출시된 지 6년 후인 1992년 미국 시장점유율 1위에 등극한 것이다. 세계적 오토바이 전문잡지 『모토사이클 인더스트리 매거진』은 그 해 판매된 헬멧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제품으로 HJC 브랜드를 꼽았다. 홍 회장은 “심장박동수가 내 귀까지 들릴 정도로 흥분됐다”며 “아직도 그 때의 짜릿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 고객 본위

홍 회장의 경영철학은 ‘고객이 원하면 절대 NO하지 마라’이다.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객 중심으로 제품을 만들라는 거다. HJC의 헬멧 브랜드수가 2만5000개에 달하는 이유다. 고객이 원하면 남들이 꺼리는 제품까지 출시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헬멧은 머리 윗부분만 보호하는 하프 사이즈ㆍ오픈 페이스ㆍ비포장도로용 오프로드ㆍ풀 페이스 등 네 가지로 나뉜다. 어떤 헬멧 제조사도 이 네 모델을 모두 만들지 않지만 HJC만큼은 예외다. 고객이 원한다는 이유로 어린이용 헬멧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고객의 목소리에 민첩하게 대응한다는 얘기다.

1위 아성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은 또 있다. 홍 회장의 변치 않는 열정과 현장경영이다. 6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는 오토바이 매니아, 심지어 폭주족까지 만난다. ‘헬멧 씌우기’는 이제 그의 전매특허다. 요즘은 LA 동쪽에 위치한 리버사이드 코로나에 종종 나간다고 말한다. “시장은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꿈틀댑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죠. 예전 방식으로 접근했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입니다. CEO는 그래서 항상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회사는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 시장무한

HJC는 미국ㆍ유럽 외 또 다른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브라질ㆍ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시장이 첫째 타깃이다.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도 노린다. 문제는 가격경쟁력이다.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시장에선 우리 헬멧의 가격이 비싼 수준입니다.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게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홍 회장은 지난해 베트남에 설립한 공장이 가격경쟁력 문제를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사진=김현동 기자

* 상세한 내용은 23일 발매되는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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