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경제학] 8.피아노 홍보사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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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베흐슈타인홀(베를린).살르 플레옐(파리).스타인웨이홀(뉴욕).치커링홀(보스턴)…. 19세기 후반 피아노 제조회사에서 자사 제품의 홍보를 위해 개관한 음악홀이다. 1920년까지만 해도 피아노 제작사의 이름을 적은 대형 표지판을 무대 정면에 걸어 놓는게 관례였다.

미국에서는 유럽의 유명 피아니스트를 초청해 순회공연을 주최했다. 베토벤·리스트 등 유명 음악인들에게 자사 피아노를 선물한 다음 그들이 보내온 찬사를 광고문구에 넣는 유럽식 마케팅 전략보다 한발 앞선 것. 기교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일수록 피아노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인웨이사의 창업자의 네째 아들인 윌리엄 스타인웨이는 1872년 러시아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슈타인(1829~94)과 2백회의 미국 순회공연 계약을 맺었다. 개런티는 4만달러. 루빈슈타인이 수퍼스타가 되면 그가 연주하는 스타인웨이의 브랜드 가치도 높아지리라는 계산이었다.

스타인웨이는 1855년부터 단 한번도 할인 행사를 하지 않는 대신 뉴욕타임스 등에 대형 광고를 꾸준히 게재해 고급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루빈슈타인은 스타인웨이 피아노만 연주하는 댓가로 개런티를 금으로 지불하고 맥주홀.카페 같은 곳에서는 공연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1872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2백39일 동안 계속된 미국 순회공연은 모두 2백15회. 2명의 성악가와 소규모 앙상블, 모스크바 음악원 동창생인 폴란드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비니아프스키와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루빈슈타인이 연주한 레퍼토리는 모두 1백50곡에 달한다.

첫 공연은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새벽까지 계속됐고, 스타인웨이홀에서 열린 미국 고별 무대에서는 관객들이 무대로 몰려가 루빈슈타인의 옷자락과 단추를 뜯어가는 소동을 벌였다.

'움직이는 광고판' 덕분에 스타인웨이의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루빈슈타인은 개런티를 계약금액의 2배나 받은 덕에 사치스런 아내 베라 때문에 진 빚을 몽땅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후 50만달러의 개런티를 제의받고서도 미국행을 거부했다.

스타인웨이와 경쟁을 벌였던 치커링사도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의 미국 순회공연을 주선했다.

보스턴에서 열린 그의 미국 데뷔공연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Bb단조' 의 초연이 이뤄졌다. 뷜로는 바그너에게 아내 코지마를 빼앗긴 인물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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