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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화려한 사당을 짓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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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09면

푸젠(福建)성 북부 샤메이(下梅)촌에 있는 추(鄒)씨 집안의 사당 모습. 17세기 초반인 청나라 때 찻잎 유통으로 거부가 된 추씨들이 세웠다. 그 집안의 부를 상징하듯 전통 오페라 무대까지 구비한 거대한 규모다.

지금은 잘나가는 중국 경제의 상징이지만 상하이(上海)는 한때 주먹들의 낭만이 차고 넘치던 곳이었다. 특히 제국주의 열강 세력들이 이곳을 조차(租借)해 중국 대륙을 야금야금 먹어가는 발판으로 활용했던 이른바 조계지(租界地) 시절의 상하이가 그랬다.
이곳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다. 중국 최근세사에서 ‘주먹’ 하나로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 바로 두월생(杜月笙·1888~1951)이다. 과일 가게 점원으로 생업을 시작했지만 워낙 빨랐던 머리 회전, 잔인한 성격, 과감하기 이를 데 없었던 행동으로 그는 상하이의 어두운 그늘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처음의 보스였던 황금영(黃金榮)의 신임을 얻어 상하이를 주름잡았던 청방(靑幇)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 문화-축선(軸線)<6>

배우지도 못했고, 집안도 가난했지만 상하이 주먹 사회의 실력자 자리에 오른 두월생이 이를 기념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집안 사당(祠堂) 다시 세우기였다. 1931년 6월 지금의 상하이 푸둥(浦東) 지역 가오차오(高橋)에 새로 지은 ‘두씨가사(杜氏家祠)’ 낙성식은 당시 화제였다.

‘깡패’에 불과한 두월생 집안 사당 낙성식에 참석한 사람의 면면은 호화롭기 그지없다. 당시의 권력자 장개석(蔣介石)과 군벌 실력자의 한 사람인 오패부(吳佩孚)가 황금 현판을 보내왔다. 전직 총통과 일부 군벌 실력자, 프랑스와 영국 조계의 경찰 고위 간부가 참석했다. 상하이 경찰청이 파견한 경찰대대와 육해군 군악대가 현장에서 낙성식 진행을 도왔다. 조직폭력배 두목이 누리는 호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화려하고 성대한 이벤트, 집안 사당 낙성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하필이면 왜 사당 낙성식인가.

190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두월생만의 경우는 아니다. 요즘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회주의 새 중국이 세워진 뒤 봉건 잔재를 일소하는 데 주력했던 공산당의 광기가 사라지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과 함께 중국의 전통이 살아나면서 이 같은 사당 건립은 이제 다시 붐을 이루고 있다.

남부 지역에서 돈을 벌어들인 신흥 자본가들이 허물어진 사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경우가 많아졌다. 옆집의 장삼이사(張三李四)보다는 내 조상을 모신 우리 집 사당이 더 근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작용한다. 경쟁적으로 더 멋있고 화려하게 사당을 보수한다.

중국인들이 집착하는 이 사당이 지니는 함의는 무엇일까. 역시 축선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중국인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혈연(血緣)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역사적인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해 보면 중국은 이 분야에서 한국인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오래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국도 조선 500년 역사만을 두고 보면 중국에 절대 밀리지 않는 ‘혈연 집착형’ 문화구조를 안고 있다. 그러나 조선 이전의 시기를 모두 포함해 살펴본다면 한반도의 혈연 집착은 중국의 전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중국은 역사를 글자로 적기 시작한 그 무렵의 훨씬 이전에 시작해 지금까지(사회주의 건국 뒤 30년 남짓의 공백기는 있었다) 혈연에 입각해 뿌리를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사회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그 근간은 종법(宗法)이다. 조상의 전통을 장자(長子)가 잇게 하는 제도다. 적장자(嫡長子)라는 개념, 즉 조상의 핏줄을 장자와 장손(長孫)만으로 이어가면서 혈통을 보전하자는 장치다. ‘종(宗)’은 그 적장자로 핏줄의 전통을 잇는 개념이다. 이는 다시 핏줄이 전해지는 흐름에서 시기마다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갈래가 나뉘면서 더 세분화하게 된다.

이 종은 ‘중심’을 형성한다. 종으로부터 멀고 가까운 정도에 따라 종법제는 사람들의 관계를 조율한다. 문중(門中)의 재산을 물려받는 경우나, 공동의 재산에서 파생하는 여러 가지 이익도 종을 중심으로 따져보는 원근(遠近)의 거리감에 따라 나뉘는 양이 달라진다.

종은 곧 축선이다. 이 축선을 따라 가문의 혈통이 일목요연하게 이어져 내려간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인 서주(西周) 때에 가닥이 잡혀져 지금까지 시행돼 온 것으로 보이는 종법제는 중국인의 사고(思考)와 매우 밀접한 ‘생활형 축선 구조’다.
제가 스스로 제 문중의 핵심에 서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행사가 두월생의 ‘집안 사당 다시 세우기’이자, 요즘 돈 잘 버는 중국 상인들이 벌이는 ‘가사(家祠) 다시 짓기’ 이벤트인 셈이다.

왕조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 냈던 옥새와 사슴 용의 이미지, 중국 선종의 법맥을 상징했다는 달마선사의 목면가사, 개개인이 공들여 짓는 집안 사당은 결국 마찬가지 코드다. 왕조를 상징하는 거대한 축선, 종교적인 마당에서 펼쳐진 축선, 개개인의 삶에 모두 들어가 있는 축선. 중국은 축선의 사고가 수도 없이 엉켜 있는 복잡한 사회다.

권력과 그에 따르는 이해관계는 그래서 중국이라는 곳에서는 매우 민감한 화제가 된다. 아울러 누가 축선에 서 있느냐에 대한 관찰은 늘 치밀하게 진행된다. 정치권에서나,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나, 개개인의 삶에서나 이 축선은 늘 존재한다. 그 선을 따라 정해지는 동서남북의 엄격한 구획선은 그곳 구성원의 역할과 권한을 세밀하게 규정한다. 축선의 구조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 안에 들어서면 동서남북 가리지 못하는 미아(迷兒)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네모’의 사회다. 한편으로는 물에 물 탄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면 축선을 상정하고 그 동서남북을 구획하는 데 빈틈이 없는 사각형(四角形)의 사회인 것이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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