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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5단계 총선음모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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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민단체가 공천반대 명단을 발표하자마자 정가 한구석에서는 즉각 음모설이 터져나왔다. 음모설은 그 대상에 따라 표적 격추용, YS죽이기, JP죽이기용에 5단계 음모론 등이 있는가 하면 발신지에 따라 청와대 음모설, 재야 음모설에 상도동 역음모설 등 갖가지다.

자민련이 터뜨린 청와대 음모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청와대가 '급진적인 친DJ 홍위병(紅衛兵)' 을 동원해 JP를 비롯한 자민련을 짓밟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민련은 아무 증거를 내놓지 못해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다.

'표적 격추설' 은 이렇다. 낙선명단은 운동권 출신과 공천경쟁을 벌이는 중진들을 낙마시키기 위해 재야에서 발사한 것이라는 설이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낙천대상 의원들의 지역엔 거의 예외없이 운동권 출신이 경합을 벌이고 있다.

'YS죽이기 음모설' 이란 것은 상도동계가 열심히 퍼뜨리고는 있지만 좀 황당하다. 부산 출신들을 포함해 YS계가 그중 많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아무튼 YS측은 이에 대항하는 대책을 구상 중이란다.

5단계 음모설이란 좀 거창한 주장은 옷 로비 등으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DJ정부가 지난해 7월부터 시작한 작전이라는 것이다.

당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지지도는 30% 미만으로 떨어져 정권유지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총선승리대책들이 마련되었는데 언론문건도 그 일환이며 H아무개 교수가 만들었다는 '총선 대비 국민적 지지기반 재강화 방안' 같은 문건도 그런 유라는 것이다.

이 음모설의 1단계가 신당창당이며 정치개혁시민운동 전개, 대대적인 사정, 재벌에 대한 공세, 그리고 야권핵심을 겨냥한 메가톤급 폭로 등이 단계단계마다 준비돼 있다는 것이다.

낙선운동은 정치개혁시민운동이고 병무비리 리스트는 대대적인 사정(司正)의 도화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음모설에 따르면 앞으로 사정바람과 재벌에 대한 공세가 예정돼 있는 셈이다.

특히 음모설의 진앙지로 추정되는 재야세력과 등이 닿아 있는 언론매체들이 음모론은 없다고 떠들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면 모두 반개혁수구(守舊)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여론조작까지 벌이고 있어 여권의 음모공작 혐의를 더 짙게 만들고 있다.

모든 음모론이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를 가지고 거꾸로 짜맞추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음모설은 선거기간 중 계속 번질 것이고 '음모문건' 들도 나타날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총선연대는 재야시민단체들의 집합체여서 혐의를 받기 쉽다. 거기에 참여한 시민단체가 무려 5백개에 육박하다보니 그들 중 누가 '친DJ 홍위병' 인지 일일이 구별해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총선연대도 의혹을 씻기 위해 모양새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름 한번 걸치겠다는 식으로 몰려오는 모든 단체를 다 받아주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고 목표가 같은 몇몇 단체와만 연대해 낙선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음모설이란 것도 하나의 선거전략일 수 있다. 낙선운동이 누구의 음모든, 또는 역음모든간에 자기네한테 유리하다면, 더군다나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그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시민단체가 제시한 명단 중에 굳이 구제해야 할 인물들이 과연 몇명이나 되는가. 소문난 부패분자, 저질의원, 군부정권의 아류들… 이런 유들이 대부분 아닌가.

이런 인물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시민단체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게 오히려 정치개혁의 편에 서서 국민지지를 받는 방안이 아니겠는가.

신당이건, 한나라당이건 그런 개혁의 소리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 들이면 그것이 자기네 당의 '음모' 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민련도 그들이 단순히 3, 5공 군부 잔류세력들의 집결체가 아니라면 그들 역시 차제에 내부의 부패분자들을 몰아내는 과감한 보수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불신의 큰 흐름을 타고 시작된 정치개혁운동이 어느 한 당의 자산일 수도 없고 어느 한 당이 독차지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정당이 '정치개혁 음모' 의 하수인이 돼야 하는 것이다.

이미 정치개혁은 시대적인 흐름이다. 그것은 누구의 음모가 아니라 바로 '시민들의 음모' 이기 때문이다.

김영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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