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학력불문/아줌마/아파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창신(金昌信)씨는 서울~인천 노선을 뛰는 45세의 고속버스 운전기사다.

중학교를 중퇴한 뒤 시내버스를 한 10년 몰다 3년 전 삼화고속으로 옮겼다.

평소 '삼화고속 계산영업소 승무원 김창신' 이라는 명함을 쓰는 그는 지난해 말 '□글전자법전 법대로. 컴 김창신' 이라는 또 하나의 명함을 만들었다.

새 명함엔 '한글 동호회 시삽' 이라는 직함도 함께 올라 있다.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운전석에 앉은 뒤 하루를 쉴 때면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 (http://bdr.pe.kr)에서 한글 사용법에 대한 사이버 강의를 한다.

그 홈페이지에서 '전자법전 소개' 를 클릭하거나 (http://bupdaero.com)을 치고 들어가면 金씨가 구축해놓은 방대한 양의 한글 전자법전을 만난다.

현행 법령 3천3백여건을 한글 97 문서로 제작해 30만개의 책갈피를 달아 60여만개의 하이퍼텍스트로 연결, 분야별.법령별.조문별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한 법전이다.

길고 긴 법문 중 필요한 부분만을 따로 내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포인트다.

그의 '사이버 경력' 은 화려하지 않다.

1990년에 컴퓨터를 처음 장만, 천리안 PC통신 동호회에 참여. 면허정지취소 행정소송을 오랜 기간 혼자 치러내면서 '법대로' 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PC통신 자료실에 '법대로로' 라는 ID로 법 관련 내용들을 올리기 시작. 반응이 좋아 e-메일이 많이 오자 94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자법전 사이트 구축에 착수. 지난해 9월에 사이트 등록, 12월 초에 개설.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경력이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평범하지 않다.

변호사가 아니라는 한계도 잘 알고 있고 어떤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시킬지도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았지만, 그의 홈페이지 방문객들은 고맙다는 표시를 통해 이미 그를 평가하고 있다.

온통 인터넷, 인터넷 하는 세상이 누구에게나 편안한 것은 아니다.

뒤처지며 소외된 것 같아 두렵고 불안한 사람들도 많다.

컴퓨터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불안감이지만 빌 게이츠 같은 거물의 "이걸 모르면 망한다" 는 경고성 예측이나 "몇년만에 몇천억원을 벌었다" 는 벼락부자의 이야기에 되레 주눅이 들고 힘이 빠지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김창신씨의 이야기는 편안하고 흐뭇한 사이버 성공담이다.

운전기사라는 보통 직업에 충실하듯 꾸준히 자기 필요에 따라 컴퓨터와 친해지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더 편안한 이야기도 있다.

안병엽(安炳燁) 정보통신부 차관을 최근 만났더니 "주부 1백만명이 인터넷과 친해지게 돕는 일이 올해의 주요 사업" 이라고 했다.

무료 교재에 싼 수강료로 주부들이 집에서 e-메일을 주고 받고 전자상거래로 물건을 사며 간단한 자료를 검색할 수준까지만 되면 대성공이라는 것이다.

편안하되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한국의 '아줌마' 들이 집에서 인터넷 바람을 한번 일으켰다? 아마도 예전의 치맛바람 저리 가라일 것이다.

여성 커뮤니티가 훨씬 강해지고, 자녀 유학 정보를 인터넷에서 얻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쇼핑을 하고, 살림의 지혜를 공유하고, 재택 근무로 돈을 벌며 때로는 사이버 데이트도 슬쩍 즐기고 등등.

그런가 하면 한때 성냥갑 또는 닭장으로까지 불렸던 아파트 단지가 내게는 최근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중국 등을 여행할 때마다 느꼈던 한반도의 비좁음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밀집해 있는 아파트 단지나 좁은 국토는 초고속통신망뿐 아니라 전기선을 이용한 통신망 등 세계로 통하는 정보고속도로를 빨리 싸게 깔 수 있는 천혜의 인프라가 아닌가.

더도 말고 작은 집이 다닥다닥인 일본과 견주어보면 우리가 훨씬 낫다.

인터넷, 인터넷 하는 소리는 이처럼 우리 주변의 편안하고 익숙한, 때로는 지겹던 데에서부터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자산이다.

자 오라, 인터넷@학력불문/아줌마/아파트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