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호들갑 떨어야 알아주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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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그러고 보니 스스로도 그런 비슷한 의문이 든 적이 제법 있었다. 히트하는 영화에서는 왜 그리 욕설과 폭력이 넘칠까? TV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은 왜 남에게 상처 주고 힘들게 하면서 불편하게 웃기려는 걸까? 탐방프로그램의 리포터들은 왜 그리들 똑같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으로 인터뷰할까? 왜 뉴스 앵커들은 다 같이 비장하게 굳은 표정과 격앙된 어조로 말할까? 왜 망가져야 시청자들과 친해진다고 생각할까? 점잖고 차분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방법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미덕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한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막말하는 특정 방송인의 퇴출을 주장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보도내용을 보면 그때 근거로 제시되었던 방송자료에는, 아예 가학적 웃음을 넘어 직설적인 욕설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웃자고 만든 프로그램에 뭐 그리 민감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청소년들에게, 나아가 전 국민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기에 알게 모르게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제법 크므로 국감에서조차 문제가 되었나 보다. 최근 미국의 인기 소설에서도, 가치관 타락의 주범으로 ‘텔레비전, 할리우드, 인터넷’을 거론하고 있다. 물론 장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유용성만큼이나 폐해도 직접적이고 크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말일 것이다.

또 얼마 전엔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각종 언론에서 문제점을 반박하며 희화화한 일이 있었다. 그에 대한 내용 분석은 이미 넘쳤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되짚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때도 어떤 이가 헌재 결정을 비판하면서 ‘강간은 했지만 임신은 유효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비판의 내용을 떠나서, ‘하고 많은 표현 중에 왜 그렇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권을 외치면서 여권(女權)이나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를 보면 그의 인권에 대한 진의에 대해서도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한동안 무자비한 아동성폭행에 대한 너무 가벼운 처벌에 관하여 크게 논란이 벌어졌다. 그 무렵에는 연일 유사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며, 성폭력 문제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웠었다. 그런데 그때도, 보도나 기사의 내용을 떠나서 그 제목으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몹쓸 짓’, ‘딸을 성노리개로’, ‘강남 여성들만 골라 성폭행’, ‘야수로 돌변한 아빠의 이상한 애정표현’ 하는 식의 표현이 거슬렸던 기억이 있다. 성폭력범의 만행에 분노가 일다가도 오히려 그러한 묘한 제목들에 대한 불만이 더 커지기도 했다. 사회적 비판과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적나라한 보도와 성토가 기능을 하는 것이겠지만 방법에 따른 부작용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나 재현 보도가 ‘범죄학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전관예우’라는 말도, 법조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처음엔 잘 몰랐던 말이다. 그런데 십여 년 전 특정 사건이 문제되면서부터, 언론의 대대적 비판을 통해 외려 홍보효과가 더 컸는지, 이제는 거의 모든 이가 변호사의 실력보다는 재판부와의 인적관계 위주로 선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대세가 된 것을 본다. 사회적 문제나 병리현상에 대해선 조용하지만 단호하고 지속적인 응징이 효과적이지, 요란한 비판과 선정적 제목이라는 방법은 외려 그것을 학습시키고 문제의 방향을 왜곡시키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에서 진실되고, 재미있고, 비판의식을 담은 내용 자체는 참 중요하다. 그러나 그 표현이나 전달방법도 역할이 크다. 물론 궁극적인 선택은 국민의 몫이다. 욕설을 해도, 막말을 해도, 이상한 제목을 붙여도, 인기가 있고 그에 관한 문제 제기가 없다면 그런 일들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김영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