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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아세요? 햇볕 쬐면 행복해진다는 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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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그림을 감상하면 우리 뇌에선 세로토닌이 분비되기 시작한다.그림은 지난 10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세로토닌전 Ⅱ, 아름다운 세상을 부탁해’에 나온 김병종의 ‘마조렐의 정원의 시’. [제공= 갤러리나우]

재일동포 유영희(58)씨의 혈중 세로토닌 농도는 310ng/㎎. 며느리 가미무라 히토미(35)의 232보다 훨씬 높다. 지난 9월 30일 두 사람의 세로토닌 혈중 농도를 측정한 일본 도쿄 도호대학 아리타 히데오 교수는 “유씨의 전반적인 건강상태가 며느리보다 낫다”며 “유씨가 매일 8㎞를 걷고 음악을 즐겨 들으며, 밝게 생활하는 것이 세로토닌 분비를 늘렸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요즘 세로토닌이 화제다. 세로토닌을 활용한 다양한 약이 출시되는가 하면 건강 서적이 출판되고, 강연회와 전시회까지 열린다. 뇌에서 분비되는 미량의 세로토닌이 과연 뭐기에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결핍되면 충동성·우울증 늘어나

우리의 뇌엔 기분과 관련된 세 가지 신경전달물질이 나온다. 노르아드레날린·도파민·세로토닌이다. 이 중 노르아드레날린은 분노를 느낄 때, 그리고 도파민은 흥분하거나 쾌감을 느낄 때 주로 분비된다. 문제는 노르아드레날린은 충동·폭력을, 도파민은 강한 의존성·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뇌가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폭주’할 때 이를 통제하는 물질이 세로토닌이다.

세로토닌(serotonin)은 혈액(sero)에서 분리한 활성물질(tonin)이란 뜻. ‘행복 물질’ ‘공부 물질’ ‘조절 물질’이라는 별칭을 갖는다. 속도·무한경쟁·대립으로 고단한 요즘 사람에게 행복감을 주고, 학습능력을 올려준다. 뇌에서 세로토닌이 결핍되면 남성은 충동성, 여성은 우울증이 증가한다.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정신과 이병철 교수는 “세로토닌이 행복·안정감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이란 것은 원숭이 실험에서도 입증됐다”고 말했다. 실제 무리의 리더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보다 혈중 세로토닌 농도가 50%나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리더가 두목 자리를 다른 원숭이에 넘기자 새로 리더가 된 원숭이의 세로토닌 농도는 올라갔고, 전 두목의 세로토닌 농도는 떨어졌다. 리더의 행복지수가 더 높았던 셈이다.

잡념 없애줘서 일명 ‘공부 물질’

도파민은 강한 쾌감을 선사한다. 2002년 일본에서 『세로토닌 결핍 뇌』라는 책을 저술해 세로토닌 붐을 일으킨 아리타 교수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 학술대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고도성장기엔 모두가 도파민을 추구했다”고 발표했다.

목표를 갖고 열심히 일하면 부유한 생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이때 도파민이 뇌에서 나온다. ‘아메리칸 드림’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 경제가 붕괴하면서 돈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많은 일본인이 깨달았다. 또 도파민적인 삶은 중독성이 있고, 늘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반작용으로 일본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세로토닌적인 삶이다. 자원봉사 등 세로토닌이 잘 나오는 삶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뇌에서 세로토닌이 잘 만들어져야 삶의 질이 향상된다. 이를 응용해 세로토닌 분비를 돕는 ‘임팩타민’ 등의 약이 출시되고 있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김대호 교수는 “세로토닌 부족은 우울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렉사프로·팩실·프로작·졸로프트 등 SSRI 계열 우울증 치료제는 세로토닌을 뇌 속에 더 오래 머물게 한다”고 설명했다.

세로토닌 결핍은 식욕 증가의 원인도 된다. 특히 살을 찌우는 당질에 대한 식탐이 늘어난다. 비만치료제 ‘리덕틸’은 세로토닌의 분비를 증가시켜 입맛을 떨어뜨리는 약이다.

세로토닌의 분비가 부족한 것이 조루의 원인이란 가설까지 제기됐다. 조루 치료약 ‘프릴리지’는 세로토닌의 분비 시간을 늘려 사정을 지연시킨다. 지난 10월 초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선 ‘세로토닌전 Ⅱ, 아름다운 세상을 부탁해’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는 최근 저서를 통해 세라토닌과 학습의 관계를 밝힌 이시형 박사(정신과)는 “세로토닌은 대뇌 피질의 기능을 살짝 억제해 스트레스·고민·갈등·잡념을 없애준다”고 말했다. 그런데 좋은 그림을 보면 뇌에서 세로토닌이 터져 나와 마음이 편안해지고 차분해지며, 학습 능률이 올라간다는 것. 세로토닌은 ‘공부 물질’이니만큼 학생들이 자주 세로토닌의 생성을 돕는 미술·음악·사진 등을 대하면 성적도 절로 오른다.

전시회를 찾은 일산 백석중 3학년 강모양은 “무심결에 그림을 쳐다봤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음악을 듣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올해 3∼4월엔 갤러리나우에서 ‘세로토닌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다.

세로토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자 세로토닌을 앞세운 다양한 제품도 출시되고 있다. 세로토닌 분비 촉진 물질이 함유됐다는 건축 마감재(세로토닌 홈)가 소개되고, 세로토닌 운동화도 나왔다. 운동화는 세로토닌이 밖에서 햇볕을 받으며 걸을 때 활발하게 분비된다는 점을 이용한 제품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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