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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실리콘밸리와 나파밸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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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는 해는 아쉬워도 뜨는 해는 눈부시다. 컴퓨터 앞에 앉은 수많은 네티즌의 창에 e-태양이 솟구친다.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바꿔놓고 있다. 말하고 사랑하고 돈 버는 방법이 깡그리 뒤집히고 있다.

디지털 장삿속이 온통 e-비즈니스요, e-경매장으로 치닫고 있다. Y2K(컴퓨터 2000년도 인식오류)를 넘겼으니 e-토피아가 열리는 것인가.

하지만 Y2K는 재앙의 끝이 아니라 불안의 시작이다. 기계 기술만이 미래의 열쇠인 양 우리의 일상을 온통 기술로 도배질하고 있는 현실을 곱씹어 볼 일이다.

필자가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 한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두어시간 차를 몰고 패블비치라는 곳으로 달리곤 했다.

패블비치는 5만개도 넘는 미국의 골프장 중 으뜸가는 코스여서 찾는 이가 많지만 가는 길목에 있는 실리콘밸리를 안내할라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시간 이상 북쪽으로 차를 달리는 나파밸리 얘기를 꺼내면 더 더욱 고개를 내저었다. 나파밸리는 포도주 생산단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사정은 어떠한가. 실리콘밸리는 돈벌레의 성지(聖地)로 변하고 나파밸리는 종가집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와인의 수도로 떠 올랐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전문가들이 눈을 가리고 뽑은 세기말 1백대 와인 중에 39개, 10걸 중에 '왕중왕' 을 포함해 4개나 차지해 유럽의 자존심인 '와인, 너마저' 미국으로 넘어간 꼴이다.

붉은 포도주가 몸에 좋다는 잇따른 의학계의 연구결과와 동유럽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독한 보드카 대신 부드러운 와인을 택하는 음주문화의 변화 덕에 와인은 한해 1천억달러 시장으로 커 올랐다. 새 천년 지구촌 축제에서 터뜨린 샴페인만 3억병이다.

나파밸리는 월가와 할리우드, 그리고 실리콘밸리에서 돈 번 사람들이 찾는 투자 종착역이 아닌가 싶다. 돈과 일에 질린 실리콘밸리 경영자들이 주말만 되면 달려가는 곳이 나파밸리다. 향기와 느낌, 푸르름과 삶의 풍요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이나 인터넷 황제 손정의(孫正義)는 정보황제답게 진작부터 그곳에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인터넷 창시자이며 화성과 빛의 속도만큼 빠른 통신망을 설계하고 있는 빈 서프(MCI 기술부사장)는 와인 수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기술은 6개월도 못가 사막의 모래동산처럼 파묻히지만 자연에 대한 투자는 천년을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다. 6일전쟁 때 이스라엘은 골란고원(高原)을 점령하자 포도부터 심었다.

땅을 빼앗긴 시리아는 분통이 터지는데도 고원을 치지 못한다. 황금알을 낳는 포도밭 때문이다. 포탄에 찢긴 척박한 땅에 가꾼 포도가 어느새 영글어 최고급 코셔와인을 빚어 20여개국에 한해 30만 상자씩 수출한다.

와인이 돈벌이와 평화를 동시에 가져다줄 줄 몰랐지만 지금 워싱턴에서 벌어지고 있는 3국 협상에서 골란고원의 운명이 최대의 쟁점이다.

나파밸리는 와인의 월가다. 한병에 80달러에 나온 와인이 몇년 새 3천 5백달러로 오른 것도 있다. 나스닥의 야후가 아무리 뛴다 해도 주가는 널뛰듯 투자자의 피를 말리지만 빈티지와인(생산연도를 밝힌 우량제품)은 오른 값이 내려가는 법이 없다.

나파밸리는 이미 만원이다. 남아프리카.호주.중남미 등으로 뻗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너도 나도 실리콘밸리 벤처 열풍에 휩싸여 있지만 다방면에 다양한 투자가 필요하다. 하이테크만이 아니라 하이터치에 눈을 돌릴 때다. 패블비치 같은 휴양지, 버클리.스탠퍼드 같은 교육 배후, 실리콘밸리만이 아닌 나파밸리 같은 향기산업의 조화만이 풍요 사회를 일궈낸다.

한국에서 대학졸업자의 80%가 갈 곳이 없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보통신업체에만 지원자가 넘쳐나고 있다. 대학마다 인문학과는 파리를 날린다.

실업고는 지망생이 없어 개문휴업이고 농촌은 공동화(空洞化)하고 있다(실리콘밸리에만 야심을 불태우지만 제2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던 미 서부의 실리콘 포리스트는 투자자들이 물러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보화는 수단이지 행복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

인터넷은 도구요 기회일 뿐 선물이 아니다. 경쟁과 중복투자가 심해 위험이 큰 벤처다. 준비와 지식 없는 '묻지마 투자' 는 증권가만의 일인가.

최규장 <在美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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