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버스에서의 세 번 실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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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 10면

단 한번의 결정적 실수로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수가 여러 번 겹치면서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경기도 분당에 사는 나는 주로 1005-1번 좌석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뒤쪽으로 더 들어가지 않고 나는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다. 전날 과음했기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렸다. 나는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축축 늘어지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서현역 정류소에서 사람들이 많이 탔다. 한 여자가 내 앞에 섰다. 미인이다. 보통 때 같으면 괜히 책 읽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머리가 너무 아팠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한 정거장쯤 더 갔을까. 두 여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자리 좀 바꿔 주실래요?”
“내리실 건가요?”
“아뇨.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계단에라도 좀 앉을까 하고.”

나는 눈을 떴다. 두 번째 실수다. 세상에는 호기심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앞에 선 여자가 버스 출입구 계단 쪽에 서 있는 여자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한 것이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얼굴은 입덧하는 여자처럼 창백했다. 바로 눈을 감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계속 그 여자를 쳐다봤다. 세 번째 실수다. 여자의 눈은 영화 ‘슈렉 2’에 나오는 고양이의 눈이다. 나는 그 고양이 바로 앞에 앉은 슈렉이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본다.

몸이 안 좋은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맞겠지만 내 몸도 안 좋다. 머리는 깨어질 것 같고 속은 메스껍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러나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은데도 자리를 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일어났다면 거짓말이고. 주위의 눈을 의식하는 그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나는 일어선다. 정말 내겐 휴식이 필요한데, 안정이 필요한데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제 자리에 앉으세요.”
여자는 인사할 기운도 없는지 겨우 목례만 하고 내 자리에 가 앉는다. 안락하고 안락한 내 자리에. 서 있으면 앉아 있을 때보다 버스 엔진의 진동, 도로 상태, 운전자의 운전 습관 등을 훨씬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나는 버스의 요동을 머리와 내장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바보 같은 자신을 비난하고 힐책한다. 왜 나는 뒤쪽으로 더 들어가지 않았던가. 왜 나는 눈을 뜬 것일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왜 바로 감지 않았을까. 내 얼굴은 숙취와 후회와 자책으로 거의 울상이다.

양재역 정류소에서 여자는 내리려고 일어선다. 몸이 한결 나아졌는지 여자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제가 어제 과음을 해서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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