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한국경제 근본이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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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새 세기 초의 세계경제를 특징지우는 큰 변화로는 여전히 글로벌화와 정보통신혁명의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이 두 변화는 하나의 축에 연결된 두 바퀴처럼 서로 밀접히 연관돼 세계경제라는 큰 수레를 움직여가고 있다.

글로벌화란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축소, 민족국가의 약화, 문화의 동질화와 같은 여러가지 현상이 뒤얽힌 복잡한 현상이다.

1990년대를 글로벌화의 첫 10년이라고 볼 때, 이 큰 흐름은 지난 몇년간 더욱 가속화됐는데, 이를 잘 나타내준 것이 세계적인 기업의 인수.합병(M&A) 붐이었다.

1998년과 1999년에 걸쳐 세계적으로 약 6조달러 규모의 M&A가 이뤄졌으며, 또한 역사상 10개의 가장 큰 M&A가 대부분 지난 두해에 일어났다. 자동차.통신.제약.금융.석유화학.영화 - 방송산업 등에서 큰 M&A가 많이 이뤄졌다.

지난 몇년간 글로벌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온 변화는 인터넷이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지난 5년간 인터넷산업은 연평균 1백80%씩 성장해 왔다고 한다. 이런 속도라면 인터넷산업은 1994~1999년 사이 1백70배로 성장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변화다.

조금 한눈 팔고 있는 사이에 이 큰 변화는 번개처럼 우리 곁을 지나 저 앞에 나가 있는 셈이다. 인터넷혁명은 세계적으로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산업혁명이 지금의 선진국간에도 1백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으며, 한국과 같은 중진국은 그보다도 더 늦게 산업화의 물결을 탄 것과 비교해 보면, 정보화의 물결은 세계 여러 나라가 거의 동시대적으로 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이런 세계적인 변화가 더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지난 3년간의 한국 경제였다. 1997년에 시작된 소위 IMF위기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국내경제에서는 1998~1999년의 두해에 걸쳐 두가지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앞에서 지적한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의 바람이며, 또 하나는 벤처와 창업의 열풍이었다. 이 두 바람은 경제위기 이후 주식가격의 상승과 엇물리면서 더욱 더 과장돼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번 연말의 각종 모임에서 최대의 화두는 바로 주식.인터넷.창업이었을 것이다.

인터넷과 창업의 바람은 한국 경제의 근본을 바꿔 놓을 큰 변화다. 지난 30년간 한국경제를 특징지어온 재벌현상은 물론 정부의 산업정책 산물이었으나, 재벌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인재와 자금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벤처와 창업의 열풍은 바로 재벌의 자원 독점력을 흔들어 버렸다. 이제 혁신적인 아이디어만 있다면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으며, 또한 창업해 성공하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부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재벌기업을 떠나고 있다.

세계적인 M&A붐과 벤처창업 붐은 상당히 모순돼 보인다. M&A는 기업의 규모가 자꾸만 커지는 것인 반면 벤처창업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새로 태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2차 산업혁명 이후 지난 1백년의 기업의 역사는 대규모화의 역사였으며 지난 2년간의 세계적인 M&A 붐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21세기에도 기업의 대형화는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21세기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는 중소기업의 세기가 될 것인가.

모순돼 보이는 이 두가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M&A는 자동차와 같은 전통적인 산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터넷이나 통신과 같은 첨단산업에서 더 극성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21세기에도 기업의 대형화는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가 더욱 진행되면서 글로벌기업이 가지는 규모의 우위는 더욱 위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벤처창업 붐은 인터넷과 같은 새 산업의 등장에 따른 현상으로서 이 산업도 성숙화하면 기업의 수가 줄어들면서 생존기업은 대형화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경제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재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야만 살아남을 것이며, 벤처와 창업의 열풍은 한국경제를 훨씬 더 활력있고 다이내믹하게 만들 것이다.

정구현 (연세대 경영대학원장)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미시간대 경영학박사. 미시간대 객원교수를 거쳐 연세대학 경영학과 교수,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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