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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때 집문서 대신 화살기계 챙겨 대나무 베러 갔다 공비로 몰리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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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파주 탄현면 법흥리. 도로 양 옆으로 붉고 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가 우거진 길. 마주보는 곳에서 차가 나타날까 조마조마해 하며 좁은 산길을 차로 한 동안 들어가니 마당 한 켠의 화사한 들꽃과 함께 공간이 툭 터지며 ‘영집(楹集)궁시박물관’이 보인다.

‘궁시박물관’ 운영하는 화살장인 유영기

박물관 앞 마당에는 사대(射臺)가 있고, 붉은 전통복장을 한 궁사(弓士) 세 사람이 여러 가지 자세로 활 쏘는 시범을 보인다. 활을 든 사람은 무형문화재 47호인 궁시장(弓矢匠) 유영기(73) 선생의 아들들이다.

맏아들 유세현은 전수생(조교)이고, 둘째 창현과 셋째 승현은 이수생이다. 동생 둘은 회사에 다니면서 이곳에 매주 들러 기예를 배운다. 유 선생은 경의선 옛 장단역 부근의 서장리라는 곳에서 증조부 대부터 화살을 만드는 살방(전방이라고도 한다)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전쟁이 나서 집을 떠날 때 부친은 집문서도 가재도구도 모두 버렸지만 화살 제작 기계와 민어부레(접착제)만은 움켜쥐고 있었다. 부친은 전쟁이 끝난 뒤 파주 금촌 황골에 정착하면서 다시 화살 제작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 활은 통에 넣고 살은 짧게 해서 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게 편전입니다. 파이프 모양으로 생긴 것에 살을 집어넣고 쏘는데 통이 활을 쳐주는 총열 역할을 하죠. 위력이 강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무기의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야외에서는 쏘지 못하게 했답니다. 조총의 위력보다 편전이 더 강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조총은 화약을 재고 불을 붙이고 해야 하지만, 편전은 계속 쏠 수 있으니까요.”

-박물관에서 보니 대포처럼 쏘는 것도 있던데요.

“예. 발사 방법이 발달해 쇠뇌와 대포를 활용하게 되었지요. 고려 말에는 스스로 날아가는 로켓형 화살도 나옵니다. 쇠뇌는 활을 발전시킨 것인데, 앞부분에는 활을 설치하고 뒷부분에는 방아쇠를 장치해 틀 위에 화살을 놓고 발사하는 무기입니다.”

-화살의 종류도 많더군요.

“촉이 다양하죠. 쏘지 않는 화살도 있어요. 예를 들면 ‘신전’ 같은 것. 신전에는 위에 신(信)자가 붙어 있죠. 삼각으로 된 노란 수건에 수를 놓았습니다. 이것을 열 개 꽂은 것을 신틀 혹은 신전틀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들고 가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신전틀을 들고 ‘여봐라, 궁궐문을 열어라’ 하면 화살을 보고는 문을 여는 것이죠.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이듯 어디든 통하는 것이었죠.”

-화살 소재는 어떻게 구합니까?

“자루 하나 메고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일정한 굵기의 대나무(죽전·竹箭)와 자작나무·버드나무·싸리나무(목시·木矢)를 찾아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좋은 곳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한번 베면 다시 재목을 찾기 어려우니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며칠씩 허탕을 칠 수도 있고, 산에서 잠을 자는 일도 많습니다. 한번은 대숲 속에 들어가 대나무를 찌는데 경찰이 몰려왔습니다. 누군가가 간첩이라고 신고한 것이었죠. 신원을 확인시키는 애를 먹었습니다.”

-누군가가 대를 이어야 할 텐데요.

“정부의 지원도 거의 없고, 순전히 고생만 하는 일인데…. 그래도 맏이가 말없이 따라줘 고맙습니다. 전통이란 그냥 개인의 희생으로 지켜져서는 안 되고, 국가경쟁력과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차원에서 제대로 지원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유 선생은 마당에서 ‘돌려쏴’ 자세로 서있는 세현 씨의 화살 끝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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