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발 빼기가 훨씬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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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경제위기를 극복했느니 못했느니, 위기가 다시 오느니 안오느니 하는 논쟁처럼 부질없는 일이 없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2년의 경제성과' 를 잘 정리해 나라 안팎에 널리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 그렇다 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이 경제이니 우리 스스로도 자신감을 갖고 국제 금융시장에도 더 믿음을 줘야 한다.

그러나 정부 어디에선가 지금부터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 어떻게 정부가 민간경제에서 발을 빼느냐' 를 놓고 - .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지금, 이 문제를 미리 생각하고 치밀한 블루 프린트를 짜서 나라 안팎에 투명한 약속으로 내걸고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지 않으면 늦는다.

우리는 금융기관이 넘어가지 않도록 받치느라 공적자금을 이미 60조원이나 쏟아부었고 앞으로도 한 30조원 더 부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으려니 하고 쉽게 받아들이기 쉬운데, 이야말로 우리 세대 모두가 '거대한 도덕적 해이' 에 빠져드는 것이다.

급한 김에 약 1백조원 가까운 돈을 끌어다 막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생전에 어떻게든 그 돈을 해결할 방도는 최소한 마련해 놓아야지 그냥 놔둔다는 것은 "다음 세대가 알아서하라" 고 떠넘기는 역사적 무책임이다.

지금의 우리 경제는 정상적인 시장경제도 아니다. 경제성장률이나 국제수지.환율로 짚어보면 정상 상태를 회복한 듯이 보이지만, 실은 기업의 부실을 금융권으로 다 옮겨놓고 이를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받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기관들은 거개가 다 국유화됐고 정부는 금융기관의 주인으로서 돈줄을 쥐고 기업을 직접 다루고 있다. 이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는 일 또한 1백조원의 공적자금 해결과 맞물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환위기가 닥쳐 정부가 직접 시장에 발을 담그긴 쉬워도 일단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여간해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이 중남미 국가들의 10년 이상에 걸친 경험이었다.

이를 박영철(朴英哲)고려대 교수는 '2단계 구조조정' 이라고 부른다. 그는 최근 한국.태국 등 아시아 위기 4개국의 구조조정 과정을 평가하기 위한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연구에 참여한 논문 '동아시아의 딜레마-구조조정이냐 성장이냐' 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부가 금융기관을 소유하고 기업 부실을 직접 다루는 정부 개입은 당장은 기업 개혁을 촉진시킬 수 있으나 결국에는 구조조정 과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 훗날 정부가 손을 떼며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부패와 관료주의의 심각한 저항에 부닥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 개입은 필연적으로 '2단계 구조조정' 을 불러오게 된다. 바로 국유화된 금융기관.기업의 민영화다. "

부패와 관료주의의 심각한 저항 말고도 2단계 구조조정이 쉽지 않을 이유는 또 있다. 정부가 쥐었던 금융기관의 소유권을 누구에게 팔 것이냐다.

모든 금융기관을 제일은행처럼 외국인에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재벌에 팔겠다고 하면 또 한번 난리가 날 것이다.

더도 말고 한번 국유화했던 한국중공업의 민영화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어 왔는지를 보면 안다. 팔 데가 마땅치 않다고 마냥 미룰 수도 없다. 제일.서울은행의 매각과정에서 보듯 파는 일이 늦춰질수록 부실은 커지고 공적자금은 더 들어간다.

서둘러 팔면 공적자금을 아낄 수 있지만 시중에서는 "왜 헐값에 넘기느냐" 는 비판은 거세도 '미루면 미룰수록 더 들어가는 돈' 이 피 같은 줄은 잘 모르니 민영화는 늦춰지는 속성이 있다. 이 또한 사회 전체의 도덕적 해이다.

위기 극복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서버린 경제를 일단 돌리는 데 성공한 지금이 위기 극복의 1단계라면 IMF 재수(再修) 졸업이 위기 극복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위기가 완전히 극복됐다고 할 단계는 정부가 민간경제에서 깨끗이 발을 뺄 때다. 경제를 민간의 손에 온전히 되돌려 놓을 때 우리 경제가 어떤 모습이 될지, 예컨대 통신회사까지 모조리 외국기업에 판 아르헨티나가 될지, 재벌의 손에 다시 돌려준 브라질이 될지, 그 과정에서 공적자금은 얼마나 건질지, 정부의 후광(後光)이 없어지며 또 다시 위기가 닥치지는 않을지 등을 우리는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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