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방송법은 시작일 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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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말 많았던 통합방송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정부 법안이 국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95년부터 번번이 발목을 잡았던 것은 '방송위원회 구성' 문제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제가 된 건 방송을 규제하는 기관.제도에 대한 반발이었다. 한때는 공보처가 없어진 자리를 방송위원회가 메움으로써 그런 반발은 쉽게 해결될 듯이 보였다.

빈 자리가 더욱 커보였는지 세월은 속절없게도 방송위원회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흘러만 갔다.

정작 방송위원회가 대통령중심제아래서 '독립 행정위원회' 로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격.권한.예산.절차규정을 갖춰야 하고, 또 직원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 등은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갓 태어난 케이블TV는 다른 정부 부처의 중계유선과 힘든 싸움을 했고, 무궁화위성을 3호까지 쏘아 올렸지만 정작 위성방송은 북한이 먼저 실시하는 웃지못할 일도 일어났다.

또한 인터넷을 이용한 방송이 이뤄지고, 개인 휴대폰으로 증권정보?비롯한 다양한 정보 서비스를 제공받게 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통합방송법은 점차 '방송위원회법' 이 아니라 국민에게 다양하고 질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법으로 인식됐다.

방송법 통과로 위성방송을 시작할 수 있고, 중계유선과 케이블TV의 갈등이 해소되며 디지털TV방송도 할 수 있다고 소개된다. 또 시청자에게 다양한 채널에 대한 선택권이 생김으로써 시청자 시대가 왔다고도 한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영상산업에서 위성을 통한 유료채널 부분이 가장 빠른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다. 위성방송 실시를 통해 영상물이 활발히 제작.유통되는 길을 만들어주고, 시장경제에 입각한 방송규제 틀을 마련한 것은 분명히 잘한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과 외국자본 등에 대해 폐쇄적인 지금의 방송법안으로 진정한 '시청자 선택' 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할리우드로부터 국산영화를 지키기 위해 '스크린 쿼터' 가 꼭 필요하다면 역설적으로 외국의 방송자본.기술.인력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상당히 열어줘야 한다.

그래야만 완성품인 영상물만 갖고 우리 시장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우리도 배울 수 있다.

중계유선과 케이블TV의 갈등을 해결한다고 하면서 정부가 추진해온 초고속망 사업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케이블망을 이용해 전화서비스를 비롯 다양한 정보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설비투자는 더욱 확대돼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다양한 채널을 채울 수 있는 우리 나름의 영상물 제작.유통능력의 확장 또한 시급하다. 특히 2001년부터 정부의 발표대로 디지털TV가 서비스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방송 디지털화' 의 태풍은 수신기를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디지털TV뿐 아니라 모든 방송 서비스의 제작.유통환경이 바뀌게 되는 대변혁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 방송법으로 대표되는 규제시스템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방송사업자를 규제 대상 정도로 생각하는 틀을 벗어나야 한다. 또한 시청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방송사업자의 자율적 편성권은 상대적으로 제약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더욱이 방송법안처럼 제작종사자로 하여금 방송사업자와 편성권을 협의하게 만들면 '방송의 자유' 는 각 방송사가 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방송의 자유' 를 지키기 위해 방송위원회를 특별한 기구로 만들어 놓을 필요도 없다는 모순에 부닥친다.

꼭 필요한 수정을 거쳐서라도 방송법은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 그것이 그동안 그냥 지나가 버린 세월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업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근거와 힘센 감독기구가 생겼다고 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방송사업자로 하여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송서비스법' 으로 방송법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디지털방송 환경을 시급히 만드는 것이야말로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방석호 홍익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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