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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아프간 수렁에 빠질 각오 돼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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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아프간에 가 있는 민간인 위주의 지역재건팀(PRT) 규모를 25명에서 130명으로 늘리면서 이들의 안전을 담당할 보호병력 300~500명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파병을 하더라도 자위용 비전투병으로 보내는 것이지, 전투병을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정부 측 설명인 듯하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비전투병으로 갔어도 불가피한 교전에 휘말리면 전투병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아프간 상황에서 전투병과 비전투병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안전지대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라크의 안전한 지역에서 민사 작전을 수행하다 무사히 귀환한 자이툰 부대와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재파병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면 아프간의 독일군을 보면 된다.

독일은 42개 파병국 중 미국과 영국에 이어 셋째로 많은 4250명을 파견하고 있다. 해외파병은 평화유지와 자위 목적에 국한한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 정부가 유지해온 원칙이었다. 국내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2003년 아프간 파병을 결정한 것은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비교적 안전한 북부 지역을 담당하게 된 데도 이런 고려가 작용했다. 독일군은 관할 지역에 파견된 두 개의 독일 PRT 등 5개의 PRT 보호 임무를 주로 맡아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한 탈레반의 공격에 맞서 교전을 벌이는 일이 잦아졌다. 총격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교전수칙은 더 이상 지키기 어려워졌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비정한 전장의 논리에서 독일군도 예외가 아닌 상황이 됐다. 급기야 이라크 군경과 합동으로 탈레반에 대한 대대적 공격에도 가담했다. 자위용으로 파병됐지만 전사자가 56명까지 늘어나면서 결국 독일군도 전쟁의 수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

인질 사태의 악몽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아프간 재파병 쪽으로 마음을 굳힌 배경은 이해할 만하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주최국에 걸맞은 글로벌 기여외교를 통해 국격을 높이는 일은 시급한 국가과제라고 봤을 것이다. 동맹국인 미국은 대놓고 말은 못 해도 한국의 군사적 기여를 고대하고 있다. 독자적 활동이 가능한 정도로 PRT 규모를 늘리면서 이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수백 명 정도의 병력을 보낸다면 아프간에 대한 기여도 늘리면서 파병 명분도 살릴 수 있다고 계산했을 법하다. 다음 달 중순으로 예정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방한 전에 선수를 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 결정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급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앞으로 아프간전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미국 자신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전쟁의 목표 자체가 불분명하다.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는 것인지 그들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9·11 테러 직후에는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한 탈레반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 목표일 수 있었다. 목표가 달성되자 안정적인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그 사이 알카에다는 파키스탄 접경 지대로 몸을 숨겼다. 쫓겨났던 탈레반은 부패한 카불의 ‘괴뢰 정부’와 그 뒤를 받쳐주는 외세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강력한 저항에 나섰다.

탈레반의 주력은 파슈툰족이고, 가장 저항이 거센 남부와 동부 주민도 대부분 파슈툰족이다. 파슈툰 주민들 틈에 섞여 탈레반이 게릴라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양민과 적의 구분은 어렵다. 무인공격기를 이용한 소탕 작전 과정에서 오폭에 따른 민간인 피해가 급증하자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탈레반에 동조하는 주민들도 늘고 있다. ‘테러 진압’보다 ‘반란 진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현지 사령관은 4만 명 증파를 요청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여전히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점점 베트남전의 악몽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이런 판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재파병 결정을 내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음 달 7일 실시될 아프간 대선 결선투표 결과와 미국의 최종 선택까지 다 지켜본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

재파병을 한다면 우리도 수렁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 상황이 종료되기 전 우리만 다시 빠져나온다는 것은 국제적 신의에 비추어 상상하기 어렵다.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추가 파병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재파병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면 모든 위험 요소를 국민에게 솔직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비전투병이란 포장어로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다가는 훗날 훨씬 호된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