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성(Sex)과 어른 대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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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옛날에는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했었다. 그러나 가장 선하게 보이는 사람도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예를 들어 목사나 신부도 때로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 구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계몽시대로 오면서 이번에는 사람을 '배운자' 와 '못배운자' 로 구분하게 됐다. 나쁜 사람은 배우지 못해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배우기만 하면 선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지나자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엄청나게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대학교수가 재산을 탐내 자기 아버지를 죽인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20세기 접어들면서 새로운 구분이 나오게 됐다. 그것은 사람을 '성숙' 한 사람과 '미성숙' 한 사람으로 구분하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 이후 사람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실험해본 결과 좋은 사람이란 결국 성령을 받은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결국 '성숙'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성숙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성숙하는 과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거나 하면 성숙이 중단된다고 한다. 이렇게 성숙이 중단된 사람, 그래서 몸은 자랐으나 마음은 아직도 어린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인 것이다.

성숙의 징후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성숙할수록 자기보다 남에 대한 관심이 많다. 사랑이란 그래서 결국 성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예수나 석가는 결국 인류가 낳은 가장 성숙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성숙의 정도를 성(sex)의 문제에서 재어 보았더니 사람이 미성숙할수록 성을 무슨 대단한 것인냥 생각하는데 비해 성숙할수록 성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노처녀 기숙사 사감은 성을 무슨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냥 온갖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생을 좀더 살아 보면 성이란 결코 그 노처녀 사감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삶을 좌우하는 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성을 무슨 대단한 것 같이 호들갑을 떨수록 인간의 삶은 속박되고 우리의 영혼은 억압된다. '남녀7세 부동석' 이란 것이 결국 따지고 보면 성에 대한 극단적인 호들갑이었다.

아직도 남녀를 완전히 격리시켜 놓은 채 사는 아랍 나라들은 성을 위해 인간을 쇠사슬에 묶어 놓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사실 성을 인간 위에 모셔놓고 산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일찍이 이 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성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인간을 그렇게 속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님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이다.

성으로부터 해방의 첫 걸음이 비록 단계적이긴 하지만 성인영화관.포르노 같은 것을 자유화하는 것이었다. 충분히 지각을 가질 만한 성인남녀가 에로틱한 영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공권력이 개입할 필요도, 그 정당성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의 표현을 표현의 자유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사생활의 일부분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진국이 하나의 사회로써 더 타락됐는가□ 그렇지 않다.

선진국의 대부분 시민들은 버스 타고 조금만 가면 있는 성인영화관이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산다.

포르노 극장들로 불야성을 이루는 지역은 사실 외국 관광객들만이 붐비지 정작 그 도시의 주민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만약 성을 개방하는 것이 사회를 정말 타락시킨다면 이미 몇십년 전부터 성을 개방한 선진국은 지금쯤은 소돔과 고모라가 돼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 선진 사회는 대체로 건전하게 굴러가고 있다. 성을 무서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대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를 성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도리어 성에 제자리를 찾아 주었던 것이다. 정부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성과 관련해 취하는 조치는 필요하고 또 정당화된다.

그러나 성인의 경우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개화된 21세기 지식, 문화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정부가 성인남녀가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으로 즐겨야 하는 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어떠한 보장도 증명도 없다.

어른을 어른으로 대해주는 사회, 언뜻 좋다고 보이는 것, 언뜻 나쁘다고 보이는 것, 그것을 다 수용하고 그것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시민에게 맡기는 사회, 그것이 다양한 사회이고 열린 사회이다.

전성철(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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