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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선 "관객 눈빛과 박수에서 떠날수가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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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출생 1979년 국립창극단 입단 2000~2006년 2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포브스코리아서울 강남구 세곡동 대모산 자락에 가면 나지막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강남구에서 보기 힘든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을 발표하면서 한쪽에서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 판소리 명창 안숙선씨가 4년 전부터 살고 있다.

임형주가 만난 한국의 리더들 4

9월 14일 찾은 안씨의 집에는 시어머니와 딸네 가족 등 3대가 살고 있었다. 안씨만을 위한 공간은 지하 1층 공연장. 그는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거나 공연 연습을 한다. 인터뷰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안씨가 오미자차를 권하면서 시작됐다.

임형주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가 많습니다.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 영원한 춘향, 인간문화재, 명창 등이죠.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수식어는 뭔가요.

안숙선 영원한 춘향이오. 저한테는 딱 기분이 좋은 말인데요(웃음), 제가 춘향이처럼 생기진 못했지만 말이죠.

임형주 아닌데요. 굉장히 단아하고 고우세요. (곱다는 얘기에 안씨는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안숙선 귀인상이란 얘기는 들어봤는데요, 미인형은 아니죠. 그보다 판소리도 춘향전을 잘 불러야 인정받거든요. 워낙 다양한 사건이 펼쳐지다 보니 판소리의 꽃이 춘향이에요. 제가 창극에서 춘향이를 처음 맡았을 때 기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임형주 처음 춘향이로 무대에 서신 건 언제예요.

안숙선 심청이, 토끼전 등은 해봤지만 춘향이는 선배나 동료에게 자꾸 뺏겼어요. 그러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 춘향이를 맡았습니다. 그때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임형주 86년부터 몇 년간 춘향이로 분장하셨죠?

안숙선 춘향이 나이가 열여덟 살인데 저는 오십이 넘을 때까지 했어요. 15년 가까이 한 셈이죠. 무대는 요술상자라 체구가 자그마한 제가 분장하고 조명 받으면 나이 들어서도 열여덟 춘향으로 비칠 수 있거든요. 이제는 나이도 먹었고, 후배들의 몫으로 자리를 비워두죠.

고 김대중 대통령이 아낀 소리꾼

임형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을 TV로 봤습니다. 선생님께서 이희호 여사의 마지막 편지를 추도창으로 부르시더군요.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안숙선 94년 수궁가 완창 때 처음 뵙게 됐죠.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요, 수행원과 이희호 여사 등 10여 분이 오셨어요. 8월 무렵이라 무척 더울 때였는데 에어컨이 없었어요. 세 시간 넘는 공연 동안 부채질을 하면서도 끝까지 들으시더군요. 공연이 끝난 후에 연락이 왔어요. 예술가를 밖으로 나오라고 할 수 없으니까, 분장실로 찾아가도 되겠느냐고요. 저야 영광이었죠. 실제로 오셔서 사진도 찍어주시고, 금일봉도 주시고 그러셨죠.

임형주 특별히 수궁가를 보러 오신 이유가 있었을까요?

안숙선 생전에 우리 소리를 아끼셨고요. 특히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수궁가를 좋아하셨어요. 제가 듣기로는 과거에 납치됐을 때 바다에 수장될 위험에 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잖아요. 수궁가 내용이 토끼가 용궁 가서 죽을뻔하다 꾀를 부려 살아난 이야기다 보니 남다르겠죠. 그래서인지 제가 토끼 역할을 할 때마다 귀엽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임형주 그 공연 이후에도 계속 인연이 있으셨나요?

안숙선 네. 그 공연이 인연이 돼서 동교동 자택과 청와대에도 여러 차례 초대를 받았었죠.

임형주 온 국민이 다 놀랐지만 갑자기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안숙선 그렇죠.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우리 음악을 사랑해 주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죠. 그래도 대통령 임무를 잘 수행하고 가셨으니 이제 편안하게 쉬시길 바랄 뿐입니다.
판소리와 함께한 52년 국악 인생

임형주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국악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있습니까?

안숙선 제 고향이 남원입니다. 지게꾼이 나무하러 갈 때 육자배기 한 자락은 눈 감고도 뽑는다는 곳이 남원 아닙니까. 저희 외가인 진주 강씨가 소리로는 호남에서 손꼽히는 가문입니다. 대금산조 중요무형문화재 강백천씨와 동편제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 강도근씨가 외삼촌이시고요. 가야금 명인인 강순영씨가 이모세요. 그렇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 가야금, 장구, 북, 꽹과리 등 국악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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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 안숙선 명창. 전주세계소리축제 공연과 창극 ‘수궁가’의 한 장면.

임형주 그래도 선생님이 재능이 있고, 국악에 재미를 느껴서 시작한 거 아니세요?

안숙선 글쎄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았어요. 어른들이 계시면 무릎 꿇고 앉아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는걸요. 게다가 어머니는 원하지 않으셨어요. 고생스러운 길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셨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힘드니까 외가에서 음악을 가르치셨어요.

강도근 외삼촌으로부터 수궁가, 흥부가,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배웠고요. 이모에게는 가야금을 비롯해 검무와 승무를 배웠습습니다.

임형주 선생님 국악 인생에 영향을 주신 분은 가족이네요.

안숙선 그렇죠. 이모와 외삼촌에게 국악의 세계와 기본기를 익힌 셈이죠. 하지만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스무 살이 넘었을 때입니다. 사실 국립창극단 입단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과연 많은 사람과 어울려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어요. 차라리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자녀 잘 키우고 살까도 했죠. 그런데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첫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선배들이 그곳에 있었던 거죠. 그들의 소리와 몸짓은 몸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었어요. 소리 한 구절에도 그 사람의 인생이 녹아 있는 거 같더군요. 그때부터 공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분들이 사라지면 다시는 배울 수 없는 거잖아요.

임형주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계십니까.

안숙선 많은 선생님이 계시지만 만정 김소희 선생님과 향사 박귀희 선생님을 꼽을 수 있겠죠. 만정 선생님에게는 정확한 음계, 박자, 무대연기 등 기초교육부터 다시 받았습니다.

향사 선생님에게는 가야금 병창을 전수받았고요. 판소리 다섯 마당은 소리꾼에게는 교과서예요. 교과서를 한 권씩 떼는 기분으로 한 마당씩 배워 발표하기 시작했고요. 그후로 30년 동안 창극도 열심히 했습니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한 적도 있고요. 주변에서 “숙선이가 소리에 미쳤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안숙선씨는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한 소리꾼이다. 지금까지 판소리를 완창한 여류명창은 손에 꼽을 정도다. 춘향전 한 마당 공연 시간만 보통 6시간 이상 걸린다. 그래서 소리꾼에게 완창 무대는 하나의 훈장인 셈이다. 그는 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명창 반열에 올랐다.

판소리 알릴 곳이면 어디든 간다

임형주 선생님의 과거 공연 내용을 보면 타 장르와 만남이 많으셨어요. 퓨전 판소리 공연을 시작한 이유가 있었나요.

안숙선 80년대 초에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초대 지휘자였던 고 홍연택씨와 함께 판소리를 편곡해 공연한 적이 있어요. 공연이 끝난 후에 연주하신 분들이 하신 얘기가 “판소리를 처음 들어보는데 참 좋다”는 거예요. 정말 놀랐어요.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조차 우리 소리를 처음 들어봤다고 하니 우리 가락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이때부터 많은 사람에게 판소리를 들려주자고 마음먹은 거죠.

임형주 새로운 도전을 하신 거네요. 어떤 공연들이 있었나요.

안숙선 지휘자 정명훈씨와 함께 판소리 한 대목인 ‘사랑가’를 공연했던 것도 생각이 나네요. 95년에는 미국의 재즈그룹 레드선과 함께 ‘토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궁가 중 한 대목을 부르기도 했고요. 판소리에 재즈와 클래식이 어우러지는 거죠. 관객들도 어떤 소리가 날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밖에도 판소리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어요. 명창의 체면보다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죠. 2002년 처음으로 심야 야외공연을 했을 때는 비를 맞으면서도 ‘수궁가’를 완창했습니다. 소리꾼에게는 소리만큼 중요한 게 관객의 관심이죠.

임형주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안숙선 임형주씨도 무대에 서 보면 알잖아요. 소리꾼은 음악을 좋아하고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박수에서 떠날 수 없어요. 저는 관객이 듣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나요. 소리를 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인생이 재미없을 거 같습니다.
임형주 50년 동안 수많은 공연을 했을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까.

안숙선 ‘88 올림픽’이 끝난 후 우리나라를 홍보하기 위해 해외로 판소리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 7개 나라에서 명창 조통달씨와 함께 공연했죠. 완창할 때는 둘이서 5시간을 할 때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말을 못 알아듣고 나가버리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다들 어깨를 들썩이며 듣는 거예요. 이 소식이 ‘더 타임스’에 한국의 판소리 대단하다고 실리면서 한 공연에 500명이 모이기도 했어요. 그때 느꼈어요. 우리 고유의 가락이 세계에서 통했다면 한국에서도 당연히 통하겠죠.

안숙선 혹시 소리 배워보고 싶은 생각 없나요. 저는 요즘 뒷산에 올라 다니면서 가곡 ‘봄처녀’를 불러보는데요. 재밌더군요.

임형주 배워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선생님의 소리나 가야금 산조도 즐겨 듣습니다. 그런데 과연 제가 판소리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섭니다.

안숙선 대중에게 잘못 알려진 게 판소리가 특별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죠. 우리말의 흥을 돋우며 가락을 넣는 건데요.

임형주 판소리 하면 영화 <서편제>가 먼저 떠오릅니다. 왠지 폭포물이 쏟아지는 바위에서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성악에서는 목에 무리가 가면 아름다운 목소리가 안 나오니 큰 일이죠.

안숙선 제 생각은 달라요. 그것은 무리한 거죠. 제 제자가 그랬다면 한 달 정도 쉬라고 합니다.

임형주 꼭 득음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안숙선 신재효 선생님께서 판소리는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이 있고, 그 다음이 느름세(판소리를 할 때 창자 특유의 연기)라고 했어요. 득음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전체를 갖춰야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임형주 그렇다면 앞으로 선생님의 계획은 더 좋은 소리를 내는 겁니까?

안숙선 소리를 내서 소리를 쌓아가는 기쁨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소리를 하는 게 행복하고 즐거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저 혼자만 소리를 갈고닦는 것은 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에게 죄송한 일이잖아요. 국악의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교육도 열심히 할 겁니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말의 의미나 장단조차 모른 채 목으로만 소리를 내려고 하죠. 그들에게 인격과 몸가짐을 갖춘 예인의 자세부터 가르치는 게 목표입니다.

기획/정리 염지현 기자·사진 정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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