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감동을 주는 지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클린턴이 다시 출마한다면 어떻게 될까. " "르윈스키 때문에 곤욕을 치르겠지만 또 당선될 걸. " 취재 현장이나 식당.카페 등에서 자주 듣게 되는 미국인들의 대화 내용이다.

물론 미 헌법은 현직 대통령의 두번 연임을 금지, 재선 대통령인 클린턴의 재출마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이 클린턴을 거명하는 것은 고어 부통령이나 부시 주지사 등 양당 선두 주자들이 왠지 못마땅하다는 푸념이기도 하다.

국민은 그만큼 클린턴이 유례없는 섹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선 주자들보다 사뭇 뛰어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최저 실업률에 경제사정도 좋고 재정흑자를 어디에 쓸지 고민하는 클린턴은 전국을 누비며 빈부격차 해소에 눈을 돌린다.

국민과 인터넷 대화를 나누며 미래지향형 지도자의 모습을 과시하는가 하면 워싱턴에 앉아 유럽의 장래를 논하며 세계 지도국의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한마디로 클린턴은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또다른 한편으론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지도자다.

그의 행보를 지켜보노라면 나라의 지도자란 국민을 감동시켜 나라일에 동참을 유도하거나 아니면 불편하더라도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명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우리 정부는 현재 반세기 묵은 고질병을 치유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불편한 길을 걸어야 하는 국민은 쉽게 지친다.

개혁 피로증상(fatigue)과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겹쳐 나타나는 일종의 자폐증(自閉症)이 우리 국민의 심리상태가 아닐까 싶다.

현실이 그렇다면 지도자는 개혁과제의 우선 순위를 재조정하고 속도의 완급을 가다듬으며 국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여유를 줘야 한다. 이는 반개혁이 아니라 개혁 완수를 위한 현실적 책략이다.

국민의 피로회복엔 감동을 주는 것처럼 좋은 약이 없다. 짜증나는 일들의 연속에 우리 국민은 감동을 잊은 지 오래다. 그래도 우리는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쉽게 감동할 준비가 돼 있는 국민이 아닌가.

길정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