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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대학실험실 실적에 집착 안전 눈감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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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학 실험실 안전문제는 소속원들의 '안전불감증' 과 같은 개인적 차원에만 맡겨둘 수 없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 전담인력.부서가 없다〓대부분의 대학은 시설관리과(課)같은 부서에서 건물이나 시설의 화재예방 업무에만 치중하고 있다. 포항공대의 경우도 시설팀에서 방재활동만 할 뿐 실험실 안전은 교수나 조교가 맡고 있다.

연세대는 관리과 산하에 안전계가 있으나 60여개에 이르는 건물의 화재예방이 주업무. 소방설비 자격증을 가진 기사 2명과 임시 기능직 2명이 전체를 감당하고 있다. 따라서 실험실 안전이나 교육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된 데는 현행 제도의 부실이 한몫 한다. 국립대의 경우 교수.조교 등 교육인력과 일반직 행정인력만을 정원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안전관련 전문인력을 채용하기 어렵게 돼 있다.

따라서 위험물관리 자격자나 방사성물질 전문인력을 채용할 때 급여나 직위 면에서 적정 수준을 보장할 방법이 없는 것.

사립대는 예산절감 때문. 한 사립대 관계자는 "실험실 몇개당 또는 면적당 안전전담 인력을 몇명 둬야 한다는 식의 의무규정이 없기 때문에 대학들이 안전전담인력 채용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 '안전' 보다 '실적' 이 우선〓서울대 공대 박사과정 金모(27)씨는 "안전문제는 실험실 연구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고 주장한다. 현재 대학원 실험실은 교수 개인이 책임지고 운영한다.

실험실 1년 예산도 교수가 기업.정부에서 따오는 프로젝트 연구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교수들은 원하는 실험 결과를 되도록 빨리 얻어야 실적을 인정받고 이후 다른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다.

시간에 쫓기고 학생들을 독려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는 것. 학생들 역시 1주일에 한번 있는 교수와의 미팅에서 실험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안전문제나 폐기물 처리는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다.

金씨는 "1주일에 4~5일은 아예 실험실에서 침식을 한다" 며 "현재 준비하고 있는 논문의 주제와 상관없더라도 지도교수가 따온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험에 동원된다" 고 말했다.

서울대생들이 지난번 원자핵공학과 폭발사건을 '산업재해' 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산업현장과 같은 각박한 연구환경 때문이다.

기계과 朴모(25)씨도 "하루 12시간 이상 실험실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규처럼 돼 있다" 며 "프로젝트 일정을 맞추기 위해 대학원생들이 혹사당하고 있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교수들의 의식도 문제. 학생들이 실험실에 하루 몇시간 있었는지 기록해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교수도 있다는 것.

한 학생은 "어떤 교수는 '나도 수십년간 실험을 해 왔지만 말짱하지 않으냐' 며 되레 핀잔을 주기 때문에 안전문제는 말도 못꺼낸다" 고 꼬집었다. 도제형태로 돼 있는 대학원 연구시스템도 안전문제를 여론화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요인이다.

朴씨는 "교수 눈밖에 나면 학위 취득이 험난해지기 때문에 웬만한 사고는 자신의 실수로 여겨 보고도 않고 넘어간다" 고 말했다.

◇ 환경오염에서 인체감염까지〓인천 모대학 공대건물 옆에 놓여 있는 5개의 대형 플라스틱통은 대학 폐기물처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 통은 실험실에서 나온 액체 폐기물을 모으는 것으로 지하 매설이 원칙인데도 외부에 노출돼 있다.

이 대학 朴모(37)교수는 "때때로 폐기통에서 악취가 나 불안하다" 며 "얼마 전까지 20ℓ들이 통에 폐기물을 담아 늘어 놓았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아진 것" 이라고 말했다.

오염된 실험동물로부터 학생들이 감염될 위험성도 높다. 실제 96년엔 서울대 의대 대학원생 5명이 유행성 출혈열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 청정 시설에서 사육된 실험용 쥐 대신 농가에서 막 기른 쥐를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실험동물학회 측에 따르면 청정시설에서 기른 쥐가 60% 정도 비싸기 때문에 아직도 대학 실험실의 절반 이상이 일반 쥐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서울대 박재학(수의학)교수가 10개 대학 연구소를 조사한 결과 6개소 실험용 쥐에서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감염된 쥐는 6백6마리 중 74마리(12.2%).

◇ 보상은 어디서〓안전 전담부서 부재는 곧 보상체계 부재로 연결된다. 지난달 발생한 서울대 폭발사건 희생자들의 경우 학교측이 가입돼 있던 경영자배상책임보험에서 1인당 1억원씩이 지급됐다.

경영자배상책임보험이란 공장.기업 등에서 기자재 등에 의해 인적.물적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해 만든 보험. 포항공대도 1인당 2억원 한도로 이 보험에 가입돼 있다. 타대학들도 한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성격의 보험에 들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측의 보험가입 사실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처리가 번거로워 소소한 사고들은 개인이 치료하는 경우가 많다.

충남대 경제문제연구소 왕창근 소장(환경공학)은 "외국은 대학에서 모든 연구 교수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상해보험을 들어주지만 아직 국내에는 그런 대학이 없다" 며 이 제도의 도입을 주장했다.

기획취재팀 고종관.이영기.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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