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리더] 리위안저 대만 중앙연구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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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요즘 대만에는 '리위안저(李遠哲.63)신드롬' 이 거세다.

그의 공식 직책은 대만 중앙연구원장. 86년 중국인으로는 네번째, 대만에서는 처음으로 노벨상(화학)을 받은 과학자다.

베이징(北京)대를 비롯해 중국 내 주요 8개 대학의 명예교수를 겸임하고 있는 남다른 대륙통(大陸通)이기도 하다.

李원장이 '대만을 구할 인물' 로 떠오른 것은 9월 21일 발생한 대지진이 계기였다. 대만 정치권에서 "李원장이 개인 신격화 운동을 조장하는 게 아니냐" 고 시샘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뜨겁다.

대지진 발생 이틀 후인 23일, 학회 참석차 이집트 카이로에 머무르던 李원장의 호텔방에 샤오완창(蕭萬長)행정원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진 복구를 위한 자문단의 단장직을 맡아달라" 는 부탁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에는 대만 사회단체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모두 그에게 '전국민 지진복구감독연맹(全盟)' 을 이끌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몇번의 고사 끝에 양쪽 요청을 모두 수락했다. 지진 복구에 관한 모든 업무가 그에게 주어진 셈이다.

대만 언론들은 지진이라는 국가 최대 위기상황에서 민(民).관(官)의 기대가 李원장에게 집중되는 특이한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드롬이란 것이다.

李원장이 이처럼 민.관 양쪽 모두에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배경은 그의 서민성.솔직함, 그리고 날카로운 비판정신이다.

대만 언론들은 "이재민들이 李원장을 포청천(包靑天)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며 "그의 행보는 내년 4월 총통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 이라고 예상했다.

李원장의 장점은 우선 겸손하다는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데다 오랜 사회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데도 언제나 '평신저두(平身低頭.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임)' 의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말투나 행동도 소탈하기 그지없어 서민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결코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것 또한 그만의 장기다. 李원장은 오래 전부터 '리덩후이(李登輝)의 훈장선생' 으로 통해 왔다. 李총통에 대한 그의 비판이 그만큼 혹독하고 끈질겼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李총통은 李원장을 내심 존경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지진 피해 현장을 둘러본 李원장은 "이번 지진은 10%의 천재(天災)와 90% 인재(人災)의 결합물" 이라고 비판했다.

정부 관리와 건축업자가 부패고리로 연결돼 있는 고질적인 사회병리현상이 재난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웠다는 지적이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 '바이다오' (白道)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고 질책했다.

대만 정부가 총통 선거를 의식해 조직폭력단(黑道)들의 납치.주가조작.정경유착을 묵인함으로써 드디어 검은 세력이 대낮에도 활보해 사회 전체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부패와 비리, 그리고 정치판의 이전투구에 염증난 대만인들이 대쪽같은 李원장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집권 국민당 일각에서 "차기 총통 선거 때 부총통 후보로 蕭행정원장 대신 李원장을 내세우자" 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李원장은 정치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이 대만인들을 더 매료시키고 있다. 벌써부터 대만인들 사이에선 "李원장은 21세기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홍콩〓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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