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투신문제 해법 이렇게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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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산실사 후 대우의 부실규모가 24조원으로 밝혀졌고 정부는 한국투자신탁과 대한투자신탁에 3조원 이상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환란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수습돼 가는 고갯길에 서 있던 지난해, 앞으로 한국경제에 남은 위험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역시 대우와 투신사 문제였다.

기능적으로 대우는 도산상태였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대우채권이 30% 할인돼 거래되고 있었고 국내에선 밀어내기 자동차수출로 생긴 수출금융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매출액이익률이 1%도 되지 않는 국내기업의 경영상태에서 자금조달 비용을 다른 국내기업보다 3%나 더 지불하면서 생존하지 못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투신사는 자본금의 몇배가 넘는 부실자산을 안고 있었다. 그동안 금리가 떨어지지 않고 또 주가가 오르지 않았다면 투신사들은 일부 은행에 앞서 문을 닫았어야 될 형편이었다.

국제자본흐름을 모니터하고 있는 워싱턴의 국제금융연구소(IIF)에서는 올해 2월 한국정부에 투신산업에 대해 우려하는 경고장을 보냈으며 세계은행도 특별조사를 수행했다. 물론 우리 정부도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비탈진 고갯길을 다 오르지 못한 한국경제가 이 두 가지의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정부는 대안을 강구했지만 오리무중인 대우의 실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고, 투신문제는 남이 해놓은 고질병으로 치부하면서 누구도 책임을 지기 싫어했던 것 같다.

대우가 '위기 속 기회' 라는 전략으로 확대경영을 취하지 않고 환란 이후 기업구조조정에 바로 들어갔다면 대우자동차 하나라도 살렸을 것 같다.

신생 투신사들만이라도 시가(時價)주의에 의한 자산평가제도를 인가 당시부터 도입했다면 한남투신이나 신세기투신의 파산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우사태로 투신사문제가 불거져 나왔지만 투신사 부실은 원초적으로 잉태돼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대우의 실상이 어느 정도 파악됐지만 투신문제는 빙산의 일각이 드러났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투신사 해결의 실마리는 정부에서 발표했듯이 공적자금 투입에서 길을 찾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는 한국경제가 견딜 만하게 됐다는 것이다. 짐은 무겁지만 짊어질 힘이 생긴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8%를 넘고 외환보유액도 6백50억달러나 쌓이게 된 것이다. 올 국제통화기금(IMF)연차총회에서 캉드쉬 총재가 한국경제의 회복을 제2의 기적으로 칭송할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대우그룹 계열사 가운데 단지 4~5개사만이 자산이 부채를 초과하고 있는 상태고 ㈜대우와 같은 경우는 50% 이상의 여신손실률이 예상되는 심각한 자본잠식 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래도 대우문제는 투신사문제를 다루는 것보다는 쉽다. 대우문제를 손가락이 하나 부러진 것에 비유한다면 투신사문제는 동맥 하나가 손상을 입은 것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우그룹 회사들은 감자(減資)조치를 취한 후 은행부채를 주식으로 스왑시키든지 전환사채로 바꾸고 부족한 자금은 공적자금 지원으로 경영을 정상화시킨 후 제3자에게 매각하는 수순을 밟는 방향으로 정리될 것 같다.

그러나 투신사문제는 천만명의 예금자를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 다루어 환매사태가 야기되면 금융시스템의 혼란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연속된 은행도산, 증권회사.생보사들의 퇴출로 불안한 상태에 있는 한국금융시스템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투신이라는 제도는 은행예금과 달리 투신운용의 결과에 따라 실적배당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손해가 나면 투자자가 부담해야 되며 외국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투신을 은행예금과 같은 금융상품으로 여기도록 유도해 왔고, 투신부실의 원인을 정부정책 수행과정의 실패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투신가입자에게 투신경영손실을 분담시킬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요사이 유행하는 민간부문 책임분담론(bail-in)이 투신업계에도 적용돼야 되겠지만 이때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금융시스템 불안으로 야기되는 비용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관계당국도 투신사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문제해결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공적자금 투입의 타당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를 기다린 듯하다.

이번 투신사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비용, 즉 국민부담의 최소화를 생각하는 대승적인 차원에서의 고려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어윤대<국제금융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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