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써버린걸 어떡해" 승인하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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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방재정을 굴러가게 하는 두개의 축은 예산과 결산이다. 결산과정에서 예산집행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해야 그 다음의 예산편성이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예산전문가들은 "결산이 예산 못지않게 중요하다" 고 말한다. 하지만 기초단체의 결산은 많은 문제점을 지닌 채 일종의 '통과의례' 로 전락하고 있다.

◇ 주먹구구식 결산심의〓기초단체의 결산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예산이 잘못 쓰였더라도 제대로 지적받지 않고 기초의회 결산 심의과정에서 그대로 승인.통과된다는 것이다.

대전시 서구 김용분(金容粉)의원의 경험담. 金의원은 지난해 말 결산 심의과정에서 시의 업무처리가 너무 엉터리여서 결산을 승인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호남선 철로 복개공사의 설계변경 추가예산 3억원과 노인정 건립설계비를 예비비에서 쓰는 등 예산집행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사후 승인인데 쓴걸 어떡하겠느냐" 는 의원들이 많아 본회의에서 18대3으로 승인되고 말았다.

서울시는 최근 특별교부금 사용조사를 벌였다. 특별교부금은 각 구청들이 특정 사업을 벌일 때 필요한 재원을 서울시가 그 사업만 하도록 지원해주는 예산. 따라서 해당사업에 사용하지 않으면 시청에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관악구의 경우 전통 야외소극장을 관악산에 짓겠다며 특별교부금 7억원을 받았으나 설계비 3천만원만 사용한 뒤 나머지는 그대로 보유했던 것이 적발됐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구의회 결산 심의과정에서 지적되지 않았다.

◇ 요식행위 결산검사〓전문가들은 "기초단체의 결산심의가 부실하게 된 원인의 하나로 그 전단계인 결산검사가 허술했기 때문" 이라고 지적한다.

기초의회는 결산심의에 앞서 결산검사위원회를 구성, 지자체가 작성한 결산보고서의 내용을 1차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하지만 공무원들과 검사위원들의 무성의로 결산검사가 제대로 안된다는 것. 대표 검사위원으로 서울의 한 구청을 점검했던 車모 의원은 "예산집행의 성과 등 결산검사를 좀 깊숙이 하면 즉시 공무원들로부터 결산검사에서 간여할 사항이 아니라며 제동이 걸렸다" 고 말했다.

심지어 칠곡군의회는 결산검사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회계사조차 두지 않고 전직 군청직원들로 채웠다. 이에 대해 칠곡군의회측은 "회계사가 일당 5만원을 받고 일하겠나. 당초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고 밝혔다.

하지만 전직 공무원이 한때 같이 일했던 공무원들이 집행한 예산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올해 처음으로 결산검사를 담당했던 金모 회계사는 "대표 검사위원으로 결산검사를 진두지휘하는 기초의원의 자질도 문제다. 내가 세입.세출 부문을 맡고 군의원이 정책사업쪽을 맡았는데 사실상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군의원이 성의없이 해서 나도 20일간의 검사기간 중 10일은 내 일을 하면서 보냈다" 고 말했다.

◇ 심각한 부작용〓기초의회의 결산을 통한 예산 견제기능이 약해지면서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당초 정해진 예산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경우. 순천시는 최근 순천 경실련 간부들과 식사를 했다며 판공비 전산영수증을 허위로 만들었다가 경실련측으로부터 지적받았다.

순천 경실련의 박철우(朴哲佑)순천대 교수는 "몇차례 기초의회 결산검사에 참여했다가 결산제도의 부실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예산 지킴이에 나섰다" 고 밝혔다.

공무원들이 결산작업에 협조를 안하는 경우. 지난 6월 서울시 한 구청의 결산검사를 했던 회계사 鄭모씨는 이상한 결산검사를 경험했다. 결산검사에 착수한지 1주일이 지나도 구청에선 그가 요구한 회계자료를 주지 않았다.

鄭씨가 해당 서류를 다시 요청하자 구청직원은 "그런 것은 왜 찾느냐" 며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鄭씨가 "장부 없이 어떻게 검사하느냐" 고 묻자 "그런 거 일일이 보지 않아도 된다. 실무작업은 우리가 다 하니 염려말라" 는 대답이 돌아왔다.

鄭씨가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그때서야 관련자료를 일부 내놓았다는 것. 결산서의 기본적인 숫자조차 틀리게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국회의 한 예산담당관은 "한 기초단체의 결산보고서는 전체 인구수와 취업인구수가 같았다. 그 지자체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취업해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말도 안되는 오류가 결산보고서에 버젓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고 말했다.

◇ 제도적 한계〓기초의회 의원들도 불만은 있다. 결산과정에서 설사 문제점을 찾더라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어 결산심의를 대충대충 한다는 주장이다. 국회가 발간한 '지방의회 의안심사기준' 에 나오는 결산심의의 정의는 이렇다.

이미 집행한 예산을 무효 또는 취소시킬 수 있는 효력은 없고…정치적인 책임을 묻는 것 이외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 결국 잘못을 발견하더라도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지방공무원들이 지방공무원법상 회계감사를 통해 예산전용 등의 책임을 지는 경우는 있어도 지방자치법상 결산제도에 의해 제재를 받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또 지자체의 회계방식이 현금출납만 점검할 수 있는 단식부기로 돼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단식부기로는 예산이 얼마나 지출됐는지는 알 수 있어도 '왜 썼고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는 알 수 없어 결산심의가 제대로 안된다는 설명이다.

지자체의 회계방식을 기업체처럼 복식부기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는 이래서 나온다.

기획취재팀〓하지윤.왕희수.양선희.나현철 기자

제보〓751-5315, 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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