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통신비밀보호법 고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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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헌법 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그중 통신에 관해 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면서 그 종류 및 형태를 막론하고 통신에 관한 비밀과 자유 및 사생활이 보장됨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감청.불법도청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주장과 이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규율하기 위한 통신비밀보호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통신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미흡하거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국가안보를 위한 감청이다. 분단국가라는 우리의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세부요건을 규정함이 없이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만으로 감청을 인정할 경우에는 오.남용의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권침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둘째 감청대상 범죄가 너무 광범위해 국민의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살인, 내란.외환, 폭발물, 마약 등의 범죄에 한해 감청을 허용하고 체포.협박.사기.공갈 등 상대적으로 경미한 범죄는 제외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일본은 지난 8월 제정된 범죄수사를 위한 통신방수에 관한 법률에서 약물.집단밀항.총기.조직살인의 경우로 감청대상 범죄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셋째 감청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이다. 범죄수사를 위한 경우 3개월, 국가안보를 위한 경우 6개월이나 된다.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만큼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된다. 일본의 경우 감청기간이 10일로, 연장하더라도 30일을 넘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긴급감청의 문제다. 예외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그 요건과 절차가 간단하고, 법원의 허가 등을 받지 않은 상태인 감청시간도 48시간에 달한다.

감청의 일반적 요건과 절차가 점차 엄격해지는 경향을 보임에 따라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은 긴급감청을 활용하려는 유인을 갖게 되고 이에 따라 그 폐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지 않는 한 감청의 불법여부에 관한 논란과 이를 둘러싼 정부에 대한 불신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그렇다면 통신비밀보호법은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의 감청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만을 담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화사회의 인권법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국가가 감청할 수 있는 대상범죄를 살인.마약.유괴 등 중대범죄로 제한하고 감청기간도 2~3개월 등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감청절차에 있어서도 통신사업자 또는 지방공공단체 직원을 감청시에 참여토록 해 공정성을 확보하고, 감청테이프 등 감청결과를 담은 일체의 자료는 법원이 6개월 이상 일정기간 보관토록 함으로써 법원의 감시. 견제기능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수사기관이 청구하는 영장에는 감청 요청자와 참여자의 신분과 위치, 구체적 범죄행위, 감청 대상자의 신분과 위치, 감청기간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토록 함으로써 수사기관의 재량남용 여지를 줄여야 한다.

물론 감청이 끝난 뒤에는 그 사실을 지체없이 당사자에게 통보해 적절한 방어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긴급감청은 예외적인 것으로 제한적으로 허용돼야 하므로 영장을 얻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긴급성, 긴급감청에 의하지 않을 경우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최소한의 필요성, 감청함으로써 얻는 이익과 통신비밀의 침해간에 비교형량할 때 최소한의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는 상당성 등 엄격한 요건을 충족하는 것을 조건으로 짧은 시간동안 인정돼야 할 것이다.

아울러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법감청, 불법도청에 대하여는 소송에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해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의 편의에 의한 감청을 최대한 억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관련법규의 정비가 필요한 바 현행 전기통신사업법 제54조 제3항은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업자들이 통신업무에 관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또한 영장이나 통신비밀보호법의 요건과 절차에 의하지 않고 수사기관이 통신서비스 소비자의 비밀을 침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

다분히 위헌 소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므로 삭제하거나 통신비밀보호법으로 일원화해야 한다.

통신의 자유의 보호정도는 그 나라의 인권수준을 말해주는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도청.감청은 법에 의해 엄격히 제한해 왔고, 일본도 엄격한 요건과 절차아래서 예외적으로 감청을 허용해 왔다.

우리의 경우 그 동안 감청현황 및 대책에 대한 정부의 꾸준한 발표가 있어 왔지만 이를 뒷받침할 입법과 노력은 행정편의주의.당리당략으로 인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국민의 불신과 의혹을 잠재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감청 앞에 유리알 인간처럼 발가벗겨진 국민들은 바로 이 땅의 주인이고, 유권자임을 위정자들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통신의 자유와 사생활은 말 그대로 기본권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어떠한 이유로도 그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올바른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을 촉구한다.

이상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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