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노근리사건과 기자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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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3월 16일 미 육군 제11 보병여단 소속 한 소대가 베트남 쾅과이 북동쪽 밀라이 마을에서 베트콩 게릴라들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 1백9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소대장 윌리엄 캘리 중위는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원 3분의1을 잃은 데 대해 보복한 것이다.

캘리 중위는 그후 양민학살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지만, 사건은 극비에 부쳐져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학살사건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무명의 프리랜서 기자 시모 허시였다.

취재지역도 베트남 아닌 미국이었다. 69년 봄 어느날 허시는 국방부의 한 취재원으로부터 밀라이 사건을 제보받았다. 취재에 착수한 허시는 제11여단에 근무했던 장병들을 찾아 미국 전역을 뒤졌다.

허시는 밀라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으며, 캘리 중위가 조지아주(州) 포트 베닝 기지에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허시는 문제의 기사를 자신이 설립한 1인 통신사 디스패치 뉴스 서비스를 통해 배포했다.

결과는 대특종이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36개 신문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밀라이 사건 폭로로 반전데모는 더욱 거세졌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허시는 이 기사로 70년 퓰리처상(賞)을 수상했으며, 탐사(探査)보도 전문기자로서 지금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발생한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을 보도한 AP통신의 집요한 취재활동은 탐사보도에서 또 하나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AP는 한국의 일부 언론 보도내용과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지난해 4월부터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미국내에 흩어진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학살사건에 가담한 생존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전쟁에 참가한 모든 미군부대의 작전일지를 입수해 사건이 발생할 무렵 부대이동 상황을 일일이 조사해 학살을 자행한 부대가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소속임을 밝혀냈다.

이어서 제1기갑사단 출신 생존자들 가운데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찾아내 이들을 상대로 1백30회에 걸친 인터뷰를 가져 완벽한 기사를 작성했다.

미국 정부는 처음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가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키자 태도를 바꿔 철저조사와 정당한 보상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AP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보도는 50년 동안 잊혀져 자칫하면 역사속에 영원히 묻힐 뻔했던 불행한 사건을 되살려냈다.

AP 특별취재팀이 보여준 철저한 기자정신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으로 정작 당사자인 한국 언론은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를 생각하면 자괴(自愧)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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