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우편 검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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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 62년 7월 전방의 군부대에서 발생한 '최영오(崔永吾)일병 사건' 의 당사자가 쓴 수기의 제목이다. 이 책은 신성일.엄앵란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상급자들이 장난삼아 하급자의 애인에게서 온 편지를 함부로 뜯어본 것이 4명을 죽음으로 이끈 끔찍한 사건이다.

서울대 재학 중 군에 입대한 崔일병은 애인에게 편지를 받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자신의 손길이 닿기 전에 병장과 상병에 의해 개봉됐다. 뿐만 아니라 동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고 조롱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항의했으나 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때마다 기합을 받아야 했다. 참다 못한 그는 어느날 아침 M1소총을 들고 나와 연병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병장과 상병을 향해 난사했다.

여덟 발의 실탄 가운데 일곱 발을 쏴 즉사시키고 나머지 한 발은 자신을 향해 발사했으나 총알은 빗나가고 말았다.

崔일병은 군사법정에 섰다. 서신의 비밀은 보장돼 있으나 상급자를 죽인 죄까지 덮어줄 수는 없었다.

여론도 동정적이었고 사회 각계에서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그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崔일병의 홀어머니는 "내가 죽을 테니 내 아들을 살려달라" 며 몸부림치다가 한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바로 그날 崔일병의 사형도 집행됐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은 데서 생긴 엄청난 결과였다.

1840년 영국에서 근대 우편제도가 시작된 이래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가 운영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는 데는 까닭이 있다.

서신의 비밀은 이용자의 기본적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반드시 확보돼야 하며, 국가가 그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제대로 지켜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신의 비밀은 국가가 철석같이 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해받기 일쑤다.

특히 국가 안보상의 문제라는 전제 아래서는 서신의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검찰부.기무사 등 군 수사기관이 올 상반기 중 우편물을 검열한 사례는 9백81통으로 지난해 상반기의 80통보다 12배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지난 한햇동안의 5백10통보다도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군이라는 특수한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은 아닐는지. 만약 검열을 통해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편법 제6장이 벌칙으로 규정하고 있는 '신서(信書)의 비밀침해죄' 에 해당하는데 군 수사기관이라면 그 법규에서도 제외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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