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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7) 분단의 서막

윤치영 비서실장은 이승만 박사 비서직을 내게 제의했지만 나는 거기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정 (單政) 수립을 향해 달려가는 李박사 측에 가담한다면 내 신념을 꺾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동도 않자 尹실장은 '이군 뜻이 정 그렇다면 능력있는 친구를 한 사람 추천해 달라' 고 부탁했다.

尹실장과 아버지의 돈독한 관계를 생각할 때 그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언뜻 연희대 학생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세영 (朴世永) 이란 친구가 떠올랐다.

워낙 성실한 데다 명석한 친구여서 李박사 비서로는 그만한 사람이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내 제의에 '어차피 정부 수립이 불가피한 만큼 李박사를 도와 일하고 싶다' 고 솔직히 얘기했다.

박세영은 23세의 젊은 나이에 李박사 비서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1955년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李박사의 정치노선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 만 할 뿐이다.

그 후 유학을 떠나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세계은행에 들어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장급까지 승진했다.

박세영은 제3공화국 초기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어 귀국을 권유받았다.

그는 미국 생활을 정리한 뒤 귀국하다 잠시 하와이에 기착했는데 머물던 호텔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李박사가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타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그의 죽음을 두고 친구들은 "李박사 귀신이 외로워서 그를 데려갔나 보다" 며 아쉬워 했다.

尹실장의 지적대로 단정 수립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종전 후 협력관계를 모색해온 미국과 소련은 47년에 접어들면서 대결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처칠이 '철의 장막' 운운하며 냉전 (冷戰) 을 기정사실화한 데 이어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공산세력을 저지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는 소위 트루먼독트린을 발표, 대소 (對蘇) 봉쇄정책을 가시화했다.

미국은 새로운 정세변화에 따라 47년 초부터 서서히 대한 (對韓) 정책변화도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워싱턴을 방문한 李박사는 미국의 한반도 '분단' 의지를 읽었고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그런 끝에 그는 미국정부가 선호하는 지도자로 재등장하게 된다.

한국독립문제는 끝내 47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 상정돼 11월 14일 본회의에서 '유엔감시하의 남북한총선거 실시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 (UNTCOK) 파견' 이 결정됐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위원단의 입북 (入北) 을 거부하자 유엔총회는 48년 2월 26일 마침내 '한국의 가능한 지역에 한해 총선거를 실시하자' 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고 말았다.

유엔결의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이 남한에 들어와 5.10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김구 (金九).김규식 (金圭植) 선생은 남북분단을 굳히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남한만의 총선거를 극력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구선생이 '남북협상' 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이미 단정으로 기울어진 시점에서 협상의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나는 현기증날 정도로 변화가 잇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혹 선각자 (先覺者) 들을 만나보면 조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이 벽초 (碧初) 홍명희 (洪命熹) 였다.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 을 쓴 위대한 민족작가였고 일찍이 중국 상하이 (上海)에서 박은식 (朴殷植).신채호 (申采浩)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거물이었다.

마침 서울신문 주필을 맡고 있던 그의 아들 홍기문 (洪起文)에게 연락했더니 흔쾌히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뒤 벽초댁을 찾아갔더니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갑네" 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날카로운 눈매에 둥근 안경 그리고 카이젤수염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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