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고 깔끔한 '송지나式 사랑'-영화 '러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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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정우성.고소영 주연의 영화 '러브' 는 마라톤선수와 재미 입양아와의 사랑을 다룬 멜로물이다. 우연히 두사람이 만나 사랑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이 부류의 고전적 문법. '러브' 또한 그것을 충실히 따른다.

남자주인공 명수 (정우성) 는 국제대회 수상경력이 화려한 한국 최고의 마라톤맨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중도 탈락한 후 실의에 빠져있던 그는 심기일전해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출전차 LA로 간다.

그러나 완주에 자신이 없자 선수단을 이탈, 육촌형 (박철수) 집으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명수는 육촌형과 친남매처럼 살고 있는 입양아 제니 (고소영) 를 만난다.

여느 멜로물이 그렇듯 영화의 발단은 이처럼 상투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긴 우연이 아닌 만남이 어디 있으랴만, 이 정도의 개연성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이제 만났으니 '문법' 에 따라 사랑의 꼭지점을 향해 두 사람이 달려갈 차례다.

이 과정에는 갈등도 주변의 질투도, 혹은 운명의 장난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굳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러브' 는 이런 식의 번거로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지극히 건조하고 밋밋하고, 그래서 따분하기까지 한 그 과정의 디테일한 묘사에 치중한다.

양념 구실을 할 만한 곁가지 에피소드를 극도로 자제한 채 서로의 사랑감정의 변화를 좇는 면에서 분명 신선한 맛이 있다.

이는 아마도 첫 시나리오에 도전한 '모래시계' 의 작가 송지나의 역량이 아닌가 한다.

영화와 달리 비교적 장시간의 TV드라마를 통해서 단련된 심리묘사의 세련미가 여기에서 잘 발휘된다. 가로등 앞에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제니와 제니를 바라보는 명수의 눈길, 또 그 눈길로 인해 타인에 대한 사랑의 눈을 뜨는 제니의 모습이 밀도있게 그려진다. 간결하지만 힘있게 전달되는 대사도 매력이다.

이 영화의 연출은 신예 이장수 (39) 감독. 송씨처럼 TV에서 영역을 넓혀 만든 첫 작품이다. 3년전 '꽃을 든 남자' 를 만든 황인뢰 감독 등 선례가 있긴하지만 드라마 PD의 영화계 입문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TV 드라마 '아스팔트의 사나이' 등을 통해 감각적 연출 솜씨를 보였던 이력이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대로 살아났다.

미장센 (장면구성)에 반영된 화려한 색채미학이나 마라톤대회를 박진감있게 재현한 라스트신은 재기발랄하다.

우리 영화에서 대표적 '사랑의 짝' 인 정우성.고소영은 '구미호' 와 '비트' 에 이어 세번째로 동반 출연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 작품으로 소원성취하는 것도 묘미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극적 장치가 부족한 이야기 구조 탓에 개성은 살지 않았고 미묘한 감정선을 표현하기엔 깊이가 부족한 연기였다.

여러가지 소박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러브' 는 화면이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언제나 안방극장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다. 18일 개봉.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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