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감상노트-무용] 유희본능 펼치는 몸동작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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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가을의 문턱에 걸터앉아 새로운 지적체험에 들뜨고픈 이들이 있다면 귀뜸해 줄만한 공연이 있다. 세계무용축제 (SI Dance99)에 초청된 미국의 세컨드 핸드 무용단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7~8일) 과 일본의 H.Art 카오스 무용단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9~10일) 내한공연이다.

세컨드 핸드 무용단은 육상선수, 무술영화 스턴트맨, 유기화학 전공 등 각자 독특한 이력을 가진 대학 동문 세 사람이 결성한 단체로 만화처럼 기발한 10분 안팎의 작품 열두개를 MTV 뮤직비디오 화면처럼 빠르게 진행한다.

현대춤에 연극과 코미디.아크로바틱까지 뒤섞어 경이로운 몸놀림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들은 실제 MTV의 단골손님이다.

카오스 무용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은 비극의 원인을 새천년의 복병 Y2K에 빗대, 컴퓨터 통신의 교란으로 설정했다. 재기발랄한 해석도 돋보이지만 단연 눈에 띠는 것은 재일교포 무용수 시라카와 나오코다.

발레로 다져진 몸에 현대춤을 섭렵해 1인2역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춘다. 오픈카 위의 춤, 공중 매달리기, 정확한 테크닉으로 80여분 동안의 장쾌한 모노드라마를 연기한다.

마지막 살점은 커녕 불필요한 근육마저 연소한 듯한 앙상하고 거친 몸이 사랑을 잃고 파릇한 경련에 휩싸일 때, 우리가 숨기고 안달하던 첫사랑의 몸부림이 생생하게 인화된다.

그때 가장 낮은음자리에 방치해두었던 심금 (心琴) 이란 현이 울린다. 세컨드 핸드 무용단은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무용비평가상' 을 수상했고, 카오스 무용단은 시라카와 나오코가 뉴욕 댄스 매거진의 3년 연속 최우수 댄서로 선정된데 힘입어 최근 미국 및 유럽에서 급부상하고 있다. 세계 무용지성이 인정하고 격찬하는 단체들인 것이다.

진옥섭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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